기술이 진보할수록 더 깊어지는 인간 사회의 내면
— 기술이 진보할수록 더 깊어지는 인간 사회의 내면
한국 사회는 늘 ‘앞서가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갈망해 왔다. 가난했던 시절을 지나,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또 한 세대 만에 디지털 혁명을 이뤄냈다. 이 빠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술이 있었다. 초고속 인터넷, 5G 세계 최초 상용화, 모바일 기반의 생활 인프라—이 모든 것은 한국인들이 자랑하는 “빨리빨리” 문화가 빚어낸 성취였다.
● 세계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인터넷 속도,
● 모바일 결제를 기반으로 한 편리한 생활,
● 디지털 기반 행정 서비스,
● 그리고 탄탄한 하드웨어 인프라.
이 모든 것을 합쳐 한국은 스스로를 정보통신 강국이라 부른다.
그러나 한 걸음 떨어져 이 성취를 바라보면, 그 찬란함 뒤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과 사회의 문화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마치 고속도로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깔렸지만, 그 위를 달리는 운전자의 안전 규범과 태도는 미성숙한 채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터넷 강국의 빛과 그림자: 공기처럼 퍼진 기술, 그러나 오염된 공기
오늘날 한국인의 하루는 디지털로 시작해 디지털로 끝난다.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 화면이 불을 밝히고, 출근길에는 지하철의 와이파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업무는 클라우드와 메신저로 진행된다. 점심시간엔 온라인 쇼핑을 하고, 퇴근 후에는 영상 플랫폼과 배달 앱이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쯤 되면 인터넷은 더 이상 ‘기술’이 아니라 ‘환경’이며, 심지어 ‘공기’에 가깝다. 그러나 공기가 맑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짜 정보와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이 공기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호흡기처럼 마음과 사고를 오염시킨다. 문제는 이 오염이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여겨지고, 사회 전체가 점점 그 부작용을 감당하는 데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기술이 빠르면 범죄도 빠르다: 디지털 범죄가 일상이 되는 시대
한국은 세계에서 디지털 사용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이 말은 곧 디지털 범죄자에게 가장 매력적인 시장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이스피싱은 더 정교해져 금융기관보다 더 금융기관처럼 말하고, 스미싱 메시지는 택배사보다 더 친절하게 안내하며, 가짜 쇼핑몰은 진짜 브랜드보다 더 세련된 디자인을 갖춘다.
사이버 공간의 범죄자들은 인간의 욕망, 불안, 기대를 정확히 겨냥한다. 그리고 기술을 누구보다 빠르게 학습한다. 기술 발전이 범죄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가 기술을 더욱 정교하게 사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N 번 방 사건 이후 국민적 충격은 컸지만, 그렇다고 디지털 성범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새로운 플랫폼, 새로운 방식, 새로운 접근법으로 전보다 더 넓고 깊게 침투하고 있다.
기술이 인간의 어둠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둠이 기술을 통해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개인정보 유출이 일상이 된 사회: 인생 전체가 데이터베이스에 담기는 시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이상한 일 중 하나는 개인정보 유출이 ‘특별한 뉴스’가 아니라 ‘반복되는 소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금융기관, 병원, 쇼핑몰, 포털, 공공기관—어디에서든 개인정보 유출 뉴스가 터진다. 유출된 정보 목록을 보고 있으면 한 사람의 생애, 건강, 소비, 취향, 경제 활동이 압축 파일 하나에 담겨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도 기업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처벌은 미약하고, 기업이 얻는 경제적 이익은 위험보다 크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개인의 정보는 기업의 자원으로 취급되고, 그 정보가 유출되면 피해는 개인이, 책임은 대체로 누구도 지지 않는 구조가 고착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법·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데이터를 바라보는 방식, 즉 인권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라는 문화적 문제다.
알고리즘 사회: 정보가 아닌 감정이 소비되는 시대
한국은 인터넷 포털 의존도가 높고, SNS 이용률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는 곧 우리가 온라인에서 보는 정보 대부분이 사업자의 알고리즘에 의해 선별되고 배열된다는 의미다. 알고리즘은 중립적이지 않다. 목표는 사용 시간이 늘어나게 하는 것, 즉 ‘수익’이다. 따라서 감정을 자극하는 콘텐츠, 특히 분노·불만·대립을 유발하는 콘텐츠가 더 많이, 더 자주, 더 널리 노출된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 정보는 늘어났지만 진실은 흐릿해졌고
● 연결은 쉬워졌지만 신뢰는 줄어들었으며
● 표현은 자유로워졌지만 갈등은 깊어졌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재구성한 세계를 보고 있다. 현실이 아니라, 현실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진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근본 원인: 기술보다 천천히 자라는 인간의 문화
첫째, 빨리빨리의 역설
한국의 기술 발전은 빠르지만, 안전·윤리·규범·신뢰 같은 문화적 요소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늘 ‘속도’에 가치를 두어 왔고 ‘안정과 성숙’을 부차적인 요소로 취급해 왔다.
둘째, 기술 중심 정책의 한계
국가 정책은 새로운 기술 도입에 집중해 왔지만 정작 그 기술을 책임 있게 사용할 시민을 길러내는 데는 인색했다.
셋째, 플랫폼 독점과 감정 경제의 확산
한국의 인터넷 생태계는 소수 플랫폼에 집중되어 있다. 이 플랫폼들은 자극적 정보—즉 감정 소비—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구조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모델이 만들어낸 부작용이다.
넷째, 사이버 안보 인식의 부재
군사력이 강하다고 국가가 안전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이버 보안이 약하면 전쟁 없이도 흔들리는 시대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의 보안 투자는 늘 후순위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길: 기술을 넘어 ‘성숙한 디지털 사회’로
① 디지털 시민성의 확립
학교 교육은 기술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말고, 비판적 사고, 정보 해석 능력, 온라인 윤리, 알고리즘 이해를 정식 교육으로 삼아야 한다. 기술은 인간을 위한 도구이며, 그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은 시민 전체가 갖춰야 할 기본 역량이다.
② 알고리즘의 투명성 강화
정보가 어떤 기준으로 배달되는지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 추천 기준을 공개하고, 편향 감시 기구를 설치하며, 플랫폼은 공공성의 책임을 져야 한다.
③ 국가적 보안 시스템 강화
사이버 보안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 전략이다. 기업과 공공기관의 보안 시스템을 통합하고, 랜섬웨어·다크웹 대응 체계를 전문화하며, 범죄 수사 인력을 획기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④ 데이터 주권 회복
개인의 정보는 기업의 자산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이다. 유출 시 기업이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고 피해 복구까지 담당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⑤ 속도 중심 문화에서 ‘신뢰 중심 문화’로 전환
한국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만들었다. 앞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인터넷 문화”를 만들 차례다.
국민적 통찰: 기술은 우리의 거울이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얼굴을 비춘다. 그리고 그 거울은 때로 너무 정직해서 우리의 욕망, 조급함, 무지, 무책임을 그대로 드러낸다. 우리는 기술을 사랑한다. 그러나 기술이 던지는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고 있는가?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을, 인간의 성숙함도 함께 발전시키고 있는가?”
한국이 진정한 정보통신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 질문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기술의 겉모습보다 기술이 사회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해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숙한 디지털 사회’에 발을 들일 수 있다.
미래는 기술이 결정하지 않는다. 기술을 사용하는 우리의 태도가 결정한다. 그리고 그 미래는 바로 지금 우리의 손끝에서 만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