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1
개구멍
(에피소드 11)
이 년 후, 우리는 다시 이사를 가게 된다. 국민학교에 오갈 때마다 스쳐 지나던 하얀색 5층짜리 아파트로 가게 되었다. 그 아파트는 군인 가족들이 거주하는 관사였고, 우리 집은 A동 1층이었다. 드디어 집 밖으로 멀리 떨어진 재래식 변소에 가지 않아도 된다. 아마 부모님도 그제야 마음 놓고 부부생활을 즐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한 방에서 함께 생활하던 나에게도 방이 생겼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작지만 소중한 나만의 공간, 새로운 시작이었다.
아파트는 A동, B동, C동, 이렇게 세 개의 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A동과 C동이 서로 나란히 마주 보고 있었고, B동은 안쪽에 따로 있었는데, B동 앞에는 PX와 놀이터가 있었다. B동 정면에는 작은 야산과 후문이 있었다. B동 후면과 PX 사잇길로 가다 보면 어느 작은 마을 어귀로 통하는 샛길이 나왔다. PX와 놀이터 바로 옆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군부대가 있었다. 그 철조망 밑으로 흙이 허물어진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군인아저씨들과 아이들이 소통하는 개구멍이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다가도 그 개구멍 근처에서 군인 아저씨가 부르면, 우리 중에서 몇 명은 거기로 달려갔다.
어느 날 나와 남동생은 PX 옆 놀이터에서 미끄럼도 타고 시소도 타면서 놀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우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으로 개구멍으로 달려가 봤는데, 개구멍 속으로 손이 쑤욱 나왔다. 아저씨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주면서 담배 한 갑 좀 사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다. 그러면서 나머지 거스름돈으로 내가 먹고 싶은 과자를 사 먹어도 좋다고 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 돈을 받아서 PX로 들어갔다.
PX 계산대에도 군인아저씨가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 아저씨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담배 한 갑 좀 달라고 말을 했다. 아저씨는 곧장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내게 담배 한 갑을 내밀었고, 나는 아저씨에게 개구멍에서 받은 돈을 내밀었다. 거스름돈을 받자, 나는 진열대에서 내가 먹고 싶었던 과자를 하나 집어서 계산대로 다시 갔다. 아저씨는 다시 거스름돈을 나에게 내밀었고, 나는 그 돈을 받아 황급히 개구멍으로 향했다.
내가 개구멍으로 담배 한 갑과 거스름돈을 내밀자, 아저씨가 착하다 고맙다고 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과자를 들고 놀이터에서 남동생과 맛있게 나눠 먹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군인아저씨에게 담배 한 갑이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무척 절실해 보이긴 했다. 그렇게 칭찬도 듣고 과자도 먹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후로 한참 지나서, 그 PX는 폐쇄되어 텅 비었다. 얼마 후, 나는 PX가 아파트 정문 쪽 경비실 옆에 있는 나름 큰 건물로 이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