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페이지

by 이월

오늘은 2024년의 마지막 날이란다. 누구에게 전해 들은 듯이 얘기하는 것은 정말로 그렇기 때문이다. TV에서 얘기하고, 남들이 말하기를 그렇단다. ‘30분 뒤에 24년이 끝난 데, 이게 맞음? 오 카운트다운한다. 실환가.’이게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쓴 나의 24년 마지막 카톡이다. 25년에는 언제쯤 25년임을 인정할까. 매번 그게 남들보다 늦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새해라고 느낄까. 12월 달력의 페이지를 넘기면? 제야의 종이 치면? 마트에서 새해맞이 세일 홍보를 하면 오케이 인정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걸까. 지구인들이 모두 새해 새해 하는 데 아닌 것 같은 기분이 왜 드는 걸까.


다들 365일의 쳇바퀴를 어떻게 굴리고 지내시는지. 내 직업은 미술학원 강사이기 때문에 학생들 그림 실력 올려보겠다고 열심히 북 치고 장구 치는 게 일 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이다. 롱패딩이냐 숏패딩이냐를 두고 고민하다 보면 입시 결과가 나오고, 그러면 나는 학생들이 좋든 싫든 커튼콜 무대에 올려세워서 박수를 받게 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레벨1인 학생들을 받아서 키우면 1년 쳇바퀴를 다시 굴리는 것이다.


*입시 결과와 상관없이 각자의 노력에 대한 박수다. 고생했다, 이놈들아.

그렇게 대학에 간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올 한 해 뭘 했나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 생각을 몇 년을 하다가 나도 뭔가 해보자며 꿈틀거리기 시작한 게 2024년이었다. 24년은 개인적으로 정말 다사다난했다. 스스로 뭔가 해보자고 한 발짝 떼었다가 우르르 따라온 것들을 수습하는 일도 겨우 하고 있었는데, 계획이나 예상에 없던 거대한 문제가 벌어졌다. 내가 겪은 일을 듣더니 친구가 위로도 못 하겠다는 듯이 침묵으로 전화기 볼륨을 채웠다. 오디오 비는 것을 참지 못한 나는 ‘야, 그래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미래에 지금 벌어진 일과 비슷한 일이 찾아올 테고, 그것의 튜토리얼을 찍먹해본거지’라며 낄낄 웃었더니 친구가 ‘럭키비키냐?’ 했다. 그 유행어를 그때 처음 알았다.


나처럼 럭키비키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올해가 작년 같고 작년이 올해 같은 비슷한 일상을 지낸 분들도 계시리라. 별로 한 게 없이 1년이 지나고 나이 앞자리 수가 바뀌는 게 탐탁지 않은데, 서점의 책들이 ‘그래도 괜찮아'라며 늘어진 모습의 일러스트와 파스텔 색조 표지로 위로를 전한다. 저런 말이 누군가에겐 필요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힘든 사람에게 전하는 쉼의 글일 수도 있고, 딱히 도드라지게 한 일이 없어 죄책감만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츠 오케이라며 자학을 멈춰주는 위로의 말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간에 훌륭한 말이겠지 생각한다. 하지만 열어보진 않았다. 스스로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생각에 쉼의 말이 와닿지 않을 것이고, 딱히 한 일이 없는 일상을 위로받아도 한심하다는 생각을 날려버릴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년이 끝났다는 게 싫었다. 그래서 잎이 떨어질 무렵부터 새해 싫어 병을 앓았다.


그랬던 나에게 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해가 짧고, 초록 풍경이 사라지는 겨울을 싫어했는데 <겨울연가> 드라마를 보고 누군가에겐 좋은 기억이 담긴 계절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아침 겨울의 고요함과 햇빛에 반짝이는 눈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일터 밖으로 나가면 노타이틀 인간이 되는 것이 싫어서 꿈틀대기를 몇 년째, 그림 전시회도 하게 되었다. 물론 원하는 대로 안 된 것들도 있다. 독학으로 도전한 자격증 시험은 합격선까지 5점이 부족해서 재시험 확정이며, 수영도 못하지만 언젠가 물놀이를 하나 배우리라 생각만 하던 때에 우연한 계기로 서핑을 배우게 되어 파도랑 싸웠다. 승마에서 말이랑 싸우면 말이 등을 안 내주는 것처럼 파도랑 싸우면 파도타기가 불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처절하게 졌고, 물만 잔뜩 먹고 나왔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업다운 일들이 쌓였는지 하나씩 읊으면 불경 외우는 줄 알고 스님들이 목탁을 손에 쥐여주실 것 같다. 탁탁탁탁 관세음보사알.


좋든 싫든, 힘들었던 재미있었던, 어찌 되었든 간에 새해를 맞이했다. 믿기지 않지만 억지로 넘겨진 다음 페이지를 채워야 한다. 싫어하는 마음도 즐거웠던 마음도 조금은 내려놓고 차분한 마음으로 목탁을 두드려* 새하얀 책을 마주해본다.


*교회 다니는 가족들의 눈총이 아프다. 너무 그러지 마요 목탁 소리 좋잖아요.


타의로 넘겨진 첫 페이지의 글은 나의 고집으로 작성하고 싶다.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머리말을 한 줄 남기는 것으로 시작해 보려 한다.


‘모두의 일상에 암씨롱 일없는 무탈함을 기원합니다.’


원하는 일을 이루시는 한 해가 되던, 원하는 게 생기는 한 해가 되던, 어떤 미래를 펼치건 간에 반갑지 않은 외부의 일을 만나서 정신없이 화내고 슬퍼하는 시간 없이, 당신을 위해 고민을 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나의 응원이 누군가의 일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자 서두르는 마음으로 새해 복을 예쁘게 포장해봅니다.


새해를 받아들여야 새해 복을 보낼 수 있을 테니 이제야 새해가 왔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나의 새해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