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몬 어드벤쳐> 만화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 나는 인기가 더 많은 <포켓몬스터>를 괜스레 라이벌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두 만화는 라이벌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인기의 격차가 컸지만, 디지몬의 진가를 알아주는 시기가 오리라는 꿈을 간직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디지몬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처음엔 작고 귀엽던 디지몬이 진화하면 공룡+기계가 되었을 때의 흉측한 디자인과 만화 속 주인공들은 초등학생이지만 내용은 어린 시청자를 위한 게 아닌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내용이며, 디스토피아적인 배경들까지. 지금 돌아보면 나의 오타쿠 돌잡이는 이때 망한 것 같다.* 밝은 내용과 귀여운 그림으로 많은 팬층을 가지고 있고, 만화 관련 상품들도 쏟아지는 포켓몬을 잡아야 했는데 마음이 찢어지는 서사를 담고 있는 디지몬을 잡았으니 마이너한 오타쿠 인생 확정이다.
*디지몬의 배경인 일본 오다이바에도 갔지만 디지몬 굿즈가 없었다.
오다이바 하면 디지몬이잖아. 왜 건담 1:1사이즈가 있냐고. 베놈묘티스몬 1:1사이즈나 설치하라.
애니메이션 봐달라면서 강제 영업은 안 할 테니 디지몬 이야기를 좀 더 들어주시라. 덧붙여 만화 이야기만으로 페이지를 다 채우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 책을 덮지 말아 주시길 청한다. 포켓몬파는 전혀 관심도 없겠지만 그동안 디지몬도 새로운 TV 시리즈나 게임들을 출시했다. 그중에 팬들이 화를 내며 ‘없던 걸로 해라’라고 인정하지 않는 시리즈물도 있었다. 그때 나도 제법 화가 났었다. 디지몬 만화 속 주인공들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항상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욕먹는 그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이 겁먹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포켓몬스터>의 지우가 피카츄의 번개를 맞는게 사실은 너무 아팠고 포켓몬의 공격성이 무섭다면서 집구석 폐인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디지몬 파들이 대동단결하여 씩씩거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윽고 ‘디지몬 찐 엔딩'이라며 홍보하는 <디지몬: 라스트 에볼루션>이 나왔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음을 미리 말씀드리는 바이다. 과거에 세계를 구했던 어찌 되었던 간에 스무살이 넘은 주인공들은 평범하게 대학생의 고민을 하고 있고, 그 아이들 옆에는 파트너 디지몬이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베스트 프렌드로 함께하고 있다. 만화 속에는 늘 그렇듯 이겨내야 할 전투가 벌어진다. 이번 전투의 페널티는 주인공들의 디지몬 친구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맙소사.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대신 친구가 죽는다니. 나는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다른 파훼법이 있겠지, 하는 희망을 마음에 품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포켓몬으로 비유하자면* 피카츄는 수명이 줄어서 30분쯤 뒤에 죽게 될 것이고 지우는 영영 파트너 포켓몬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포켓몬으로 비유해야 대중에게 공감을 얻기 쉽다는 점이 디지몬 팬으로서 자존심 상한다.
만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미래를 위해 전투에 나가기로 결정했을 때, 그 단단한 결의를 보면서도 모니터 밖 시청자인 나는 ‘감독님 다 뜻이 있으시죠?’라며 윙크를 찡긋하며 해피엔딩을 기다렸다. 이윽고 전투 장면이 끝났고 주인공의 디지몬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까지 얼마 안 남은 시간이 화면에서 재생되었다.
#라스트신
남은 짧은 시간 동안 신태일과 아구몬은 함께 석양을 보고 있다. 아구몬과 키가 비슷하던 초등학생 신태일은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서 훌쩍 컸고, 아구몬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신태일의 무릎 정도의 키 높이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아구몬: 내일은 뭐 할 거야?
아구몬이 자신이 없을 내일을 묻는다.
신태일: 글쎄, 우리 같이….
석양을 보던 태일이 말을 이어가며 아구몬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아구몬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석양이 사그라들어 어둑해지는 하늘. 흘러가는 물소리, 저녁 도시의 소음만이 공간을 채운다.
참 디지몬답게 죽음에 자비가 없는 엔딩이었다. <포켓몬스터>는 해프닝 같은 포켓몬 배틀을 하지만 디지몬은 항상 ‘네가 죽든가 아니면 내가 죽는다’라는 결말을 두고 싸우기 때문에 결과에 따라 미래가 바뀐다. 만화 속 등장인물도, 보고 있는 팬들도 슬프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벌어진 일을 맞이해야 했고 다음 이야기로 나아가야 했다. 여러분은 디지몬 좋아하지 말고 꼭 포켓몬 좋아하시길.
잠깐 잊고 살던 디지몬이 왜 생각이 났을까, 하필 이 장면이. 나의 디지몬을 최근에 하늘로 보냈기 때문이다. 무슨 오타쿠 같은 말이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디지몬은 반려동물 같기도 하다. 길게는 이십 년 정도 되는 기간을 함께 있다가, 내가 이제야 조금씩 삶을 자신의 패턴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쯤 하늘로 가버리는 괘씸한 내 가족.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20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파도는 울렁거리고, 길을 잃고, 와중에 비 때문에 미끄러져서 무릎이 깨지면 와하하 웃다가 꺼이꺼이 울던 그 십 년 동안 단단한 장식용 뱃머리 목석처럼 예쁜 모습으로 가만히 곁을 지키던 내 고양이가 생각이 났다. 이제 겨우 나이 삼십이 넘었는데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가시고, 내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아먹던 룸메이트 고양이도 가버렸다. 어른들은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의 경험을 겪고 어떻게 지내 오신 걸까. 디지몬과 함께하다 영원한 이별을 맞이한 선택받은 아이들은 어떻게 그 후의 시간을 살아간 걸까. 나 빼고 다들 너무 강한 것 같다.
주민등록증을 받고도 십 년이 넘었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는 어른이 되었지만, 종종 어른들은 이걸 어떻게 하신 거람 하며 올려다보게 되는 일이 생긴다. 그러면 우리 엄마는 이십 년 전쯤 힘들었던 시기의 이야기하다가 분노 버튼이 눌려서 아빠에게 따발총을 쏘는 명사수가 되신다. 얘기를 괜히 꺼냈다 아빠 미안.
우리 엄마처럼 강하게 살아갈 자신은 없으니 그냥,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엄마의 따발총이 나에게 안 오게 회피 기술이나 익혀야겠다. 그러다 보면 지나간 모든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익숙한 집 현관에서 운동화의 앞코를 툭툭 쳐서 신발을 바르게 신고 밖으로 나가야지. 그렇게 일상을 수십 번, 수만 번 보내야겠다. 만화의 오프닝 같은 장면을 반복할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음악 주세요. 디지몬 극장판 오프닝으로.
그래~그리 쉽지는 않겠지~ 나를 허락해줄 세상이란~
유치하다는 웃음으로, 엉뚱한 시선으로 오늘의 1화를 시작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