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중국, 달 여행하다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서쪽 구석, 코레르 박물관의 돌계단을 올라간다. 무려 16유로를 내고 들어가면 대리석과 주화와 지구본이 가득한 전시실 열아홉 개를 지나면, '마르차나 도서관'이 있다. 그곳엔 그리스 로마 필사본 컬렉션들과 베네치아에서 출간된 책은 전부 보관해 놓았다. 한쪽엔 허가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프라 마우로 Fra Mauro라는 베네치아의 수도사가 1459년에 제작한 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가장 정교한 세계 지도 중 하나로 꼽힌다.
좌-마우로의 지도 우-위성에서 찍은 지구
마우로는 일찍이 누구보다도 널리 세상을 여행했다. 그의 경험으로 제작한 지도들은 이미 무역지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가 제작한 이 원형 세계 지도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를 위해 제작되었는데 지름이 약 2m다. 원본은 소실되었지만, 베네치아 군주를 위해 만들었던 복사본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 지도에는 약 3000개의 지명이 적혀있다. 물론 강이나 지역 위치의 오차가 있긴 하지만 지리학의 과도기에 제작된 지도로서는 결정판이다. 당시 지도는 주변국만 그려 넣었는데, 이 지도에는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자바 섬이 그려져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15세기의 마우로가 13세기의 마르코 폴로의 기록을 보고 지도를 그렸다는 것이다. 세상을 보고 싶었던 용기 있는 자는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물론 '동방견문록'의 진실성과 사실여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그러나 마우로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지도는 40년 후에 영국 헨리 7세의 후원을 받아 탐험에 떠나는 베네치아인 '조반니 카보토'의 손에 들렸다. 이것은 베네치아의 지도 제작 기술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많은 베네치아의 탐험가들은 지도를 들고 출발한다.
베네치아가 이렇게 탐험에 진심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렇게 미지의 세계를 목숨 걸고 나가려 했을까?
바로 권력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공화국으로서의 자기 도시뿐 아니라 자신의 통치력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 확고한 세력 과시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가봐야 한다. 남이 모르는 곳에 먼저 가서 깃발을 꽂아야 하는 것이다. 지도는 그 도구 중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베네치아는 더 멀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질문했고. 호기심을 가지며, 상상했을 것이다. 베네치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상상력의 도시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곳에서 길을 잃는다. 베네치아의 지도를 들고 다녀도, 구글맵을 들고 다녀도 관광객들은 길을 잃는다. 그저 물어보고, 걷고, 행운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곳은 이미 13세기부터 길을 찾아다니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길을 찾아야 하는 간절함과 용기가 필요한 곳이었다.
바로 그곳이 '베네치아'다.
서양의 지도가 중국을 바라본 관점은 '착취'다. 그래서 중국으로 가는 길을 '실크로드'라고 불렀다. 거대한 시장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인이 본 중국의 모습은 어땠을까? 진나라 시대의 장형(이름)이란 학자가 크기와 축척의 체계를 마련했다고 한다. 관료였던 배수(이름)가 18장의 지도책을 제작한다. 이 지도가 최초의 지도지만 남아있지 않다.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지도는 1137년의 '화이도'이다. 이름을 번역하자면 '중국과 다른 오랑캐 나라들의 지도'이다. 역시 중국이 가운데 있다.
고대부터 중국은 여러 나라들의 건국과 패망이 활발했다. 그들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 권력의 도구인 지도가 중요했다. 이때 등장한 주사본(이름)의 '여지도'는 향후 500년 동안 그려질 모든 지도의 공식적인 본보기가 된다. 이 지도도 중국만 그려져 있고 만리장성이 상징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주사본의 세계관은 거의 아랍 상인들에게서 얻는데, 그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적는다.
'남해 남동쪽과 몽골 북서쪽 오랑캐 나라들이 끊임없이 공물을 바치고 있지만, 너무 멀기 때문에 직접 조사할 방법이 없다. 그런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하지 않아 믿을 수 없어서 그런 나라들은 제외하겠다'
바깥세상에 대해 품었던 두려움과 고의적인 무시를 잘 보여준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중국의 세계관이 아쉽긴 하다. 이 세계관은 중국의 역사에 큰 고난으로 돌아오니까 말이다.
1964년 레인저 7호가 달의 이미지를 고해상도 사진으로 전송하면서 달 지도 제작이 시작된다. 1966년~68년에 걸쳐 서베이어 미션에서 탐사선들이 달 표면에 착륙하면서 더 구체화된다. 특히 서베이어 3호는 아폴로 12호 착륙지점을 미리 조사하며 데이터 수집을 한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인간이 직접 달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달의 지도 제작이 힘을 받는다. 1971년 2월 5일, 아폴로 14호의 우주 비행사 앨런 셰퍼드와 에드거 미첼은 지구에서 보이는 쪽의 달 표면에 착륙한다. 그곳의 이름을 프라 마우로층이라 이름을 붙었다. 지름이 80km로 달에서 가장 큰 분화구 중 하나이다. 왜 그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초의 원형 지도여서 그랬나 보다.
지도는 인간에게 참 중요한 도구이다. 권력자들에게는 힘을, 탐험가들에게는 모험을, 우리에게는 상상력을 주는 도구이다. 이젠 달을 넘어 우주로 지도를 그리러 나간다. 우리의 권력과 모험 그리고 상상력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