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프톨레마이오스, 콜럼버스, 아메리고
15세기 중엽, 피렌체의 학자 야코부스 앙겔루스는 호메로의 그리스어 판본을 라틴어로 옮길 계획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어슬렁 거린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더 귀한 것을 발견한다. 이 발견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을 작품이었다.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었다. 앙겔루스는 그 책을 바로 번역한다. 2년 뒤 볼로냐에서 출간된 판본에서는 총 61쪽 중 26쪽이 지도로서, 고대 지도를 현대 인쇄물로 구현한 최초의 '지도책'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앙겔루스의 발견과 번역과 출판은 지도 제작의 황금기를 알렸다. 사람들은 생생한 이 지도를 예술과 과학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개념으로 받아 들었다. 이때부터 지도는 부와 권세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수집 열품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왜? 다시 지도가 중요하게 여겨졌을까? 창고에 박혀있던 지도, 지리학이 다시 중요하게 여겨지기까지 왜 이리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앙겔루스가 지도를 출판했을 때는 유럽에 인쇄 산업이 융성했고, 튼튼한 배와 항해술이 발전되었다. 상세한 지도는 아니었지만, 몇 안 되는 지도를 들고 바다로 나가려 했고, 그 자본을 대는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다.
또한 르네상스가 폐쇄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종교주의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꿔놓음으로 지도에 대한 열망과 중요성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즉 권력을 가지고자 했던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를 보면서 내가 밟고 서있는 곳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분명 보이지 않는 곳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 상상을 현실로 가져오려면 지도 필요했고, 현실로 이루고자 하는 용기 있는 자가 필요했다.
1492년부터 1504년까지 네 차례 대서야 횡단 항해에 나섰을 때 어떤 지도를 갖고 갔을까? 아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를 가지고 갔을 것이다. 콜럼버스의 용기 있는 발걸음은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디딤과 동일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지도가 정확하지 않은 터라 도착한 곳의 지명을 잘못 지은 곳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의 바하마 제도쯤 도착한 그는 그곳이 아시아에 도달했다고 생각해서 그곳에서 만난 타이노 부족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근처를 돌아다니며 지금의 쿠바를 중국으로 착각한다. 그곳이 스페인을 연상시킨다 하여 '히스파니올라-스페인의 섬'이라 이름을 붙인다. 두 번째, 세 번째 항해를 하면서 더 많은 곳을 발견한다. 후안 데 라 코사는 콜럼버스와 함께 항해했던 수석 항해사 었다. 그는 그의 기록으로 항해의 지도를 그려 남기기도 한다.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콜럼버스가 나아간 길은 대단하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유럽이 전부였던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신세계는 경제적 혁신과 그로 인한 자본주의 발전, 그리고 새로운 계층의 탄생, 군주와 귀족의 몰락, 계몽주의, 시민혁명까지 모든 유럽 역사의 시작이었다. 인류의 지식과 세계관을 확장시킨 혁명적인 사건이지만, 착취, 학살, 정복이라는 부정적인 역사도 함께 봐야 한다. 누구에게는 이득이지만 누군가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역사다.
피렌체 출신의 금융업에 종사하던 베스푸치는 그다지 대단한 항해사는 아니었다. 그가 세비아 은행에서 일할 때 콜럼버스의 초기 항해 자금을 그 은행에서 댄다. 아마도 그때 콜럼버스를 보고 친구가 되었거나 신세계 탐험의 열정을 품었으리라. 베스푸치는 은행에서 잘리고, 배에 탄다. 콜럼버스 때문일지도... 그가 항해 쪽에 재능이 없지만, 어떻게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남기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스푸치의 사기다. 발트제뮐러라는 지도 제작자의 지도가 문제 었다.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보다 1년 먼저 남아메리카 대륙을 밟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것은 거짓이라 밝혀낸다. 물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가 아시아라고 했던 곳을 신대륙임을 인식하고 밝혀내는 업적도 있다.
1507년, 독일의 지도 제작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제작한 지도가 발단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베스푸치가 남긴 자신의 항해 경험을 과장해서 남겼는데, 그것을 발트제뮐러가 지도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콜럼버스가 몰랐던 것을 베스푸치가 알아냈던 것에 감명을 받았을까?) 당시는 탐험에 대한 이야기와 그것을 담은 지도가 상업적으로 큰 흥행을 했다. 아마도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과장된 이야기를 들은 제작자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지도가 출판된 뒤 발트제뮐러는 대륙이름을 수정한 지도를 내놓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발트제뮐러의 지도는 이미 다른 지도에서 적용하여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영원히.
동시대를 살고, 함께 탐험을 한 두 영웅은 조금 다르게 역사에 남았다. 콜럼버스는 대항해의 시대를 시작한 상징적인 인물로, 베스푸치는 신대륙을 명확히 한 인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다.
유럽인들의 우월함과 잔인함을 시작한 두 인물. 콜럼버스와 베스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