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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주사위를 던져라

주령구의 비밀

by 작가의숲

신라시대 유물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고 기발하다고 생각되는 건 주령구이다. 경주에서는 그 모양을 본떠 만든 빵도 나와 있으니 색다른 재미까지 느낄 수 있는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


1974년 경주시는 당시 안압지라 불리던 월지를 깨끗하게 청소하려고 정화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경주사적관리소가 연못 중심부를 조사하던 중에 너무 많은 유물이 쏟아진 것이다. 이에 정식보고 과정을 거쳐 그 이듬해인 1975년 3월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고 6월에 연못 서쪽의 석축 바닥에서 주령구를 발견했다.


그 이름과 모양부터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주령구는 사실 나무로 만든 주사위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깍두기 모양의 정육면체가 아니라 14면체 주사위이다. 그러다 보니 모양 자체가 매우 독특하다. 정사각형면 6개와 육각형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각 주사위의 면에는 4 글자 정도의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 사각형(6개 면)

1. 금성작무(禁聲作舞) 음악 없이 춤추기

2. 중인타비(衆人打鼻) 여러 사람 코 두드리기

3. 음진대소(飮盡大笑)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4. 삼잔일거(三盞一去) 한 번에 술 석 잔 마시기

5. 유범공과(有犯空過)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6. 자창자음(自唱自飮)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 육각형(8개 면)

7. 곡비즉진(曲臂則盡) 팔뚝을 구부려 다 마시기

8. 농면공과(弄面孔過) 얼굴 간질여도 꼼짝 않기

9. 임의청가(任意請歌)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시키기

10. 월경일곡(月鏡一曲) 월경 한 곡조 부르기

11. 공영시과(空詠詩過) 시 한 수 읊기

12. 양잔즉방(兩盞則放) 술 두 잔이면 쏟아버리기

13. 추물막방(醜物莫放) 더러운 물건을 버리지 않기

14.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 스스로 괴래만을 부르기

*괴래만은 밤늦게 술 먹고 노래 부르면서 휘적휘적거리며 들어오는 품새를 의미함


주령구에 새겨진 글씨는 모두 음주가무와 관련된 거였다. 궁중에서의 연회 때 사용하던 주사위로 ‘술과 관련된 벌칙을 내리는 도구’라는 의미를 담아 주령구(酒令具)라 부르게 된 것이다. 술과 관련해 14가지나 되는 벌칙을 새긴 주령구를 통해 신라인들의 재밌는 놀이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독특한 모양의 14면체를 어떻게 만들었을지 정말 궁금했다. 더구나 6개의 육각형과 8개의 사각형이 어떻게 정확하게 맞물렸는지도 신기하다. 연구 결과 주령구의 더 놀라운 건 육각형의 면적은 6.265㎠, 사각형 면적이 6.25㎠으로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14면 가운데 각각의 면이 나올 확률은 거의 1/14라는 사실이다. 경우의 수까지 철저하게 계산해 만들었다. 높이도 4.8㎝여서 한 손에 잡히는 적당한 크기였다.


특히 수학적으로 정다면체가 가능한 것은 정 4면체, 정 6면체, 정 8면체, 정 12면체, 정 20면체 등 5개뿐이다. 그런데도 신라인들은 정다면체가 불가능한 14면체의 면 넓이를 거의 똑같이 만들어 동일한 확률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신라 장인의 솜씨도 뛰어나지만 그들의 인문학적인 감수성과 수학적 사고능력도 놀라울 따름이다. 더구나 발굴 당시의 주령구를 보면 그 오랜 시간 연못 속에 파묻혀 있었다는 게 믿기로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참나무로 만들어 옻칠까지 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어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령구를 발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자레인지에 넣어 습기를 제거하던 중 오작동으로 인해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이 같은 사실은 소실되고 10여 년이 지난 1989년에 일반에 드러나게 되면서 적잖은 파장이 일기도 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주령구라고 알고 있는 건 사실 복제품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란 늘 순간적인 판단이나 결정에 의해 보존되거나 파괴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주령구가 있었다면 그야말로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문화재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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