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
내가 고등학교 때 국립경주박물관의 입장료는 70원이었다. 그때 당시에도 정말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유물을 마음껏 보는 데 70원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 때론 미안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때 나는 거의 매주 주말 박물관을 찾았다. 그 정도로 자주 찾았다면 박물관의 유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꿰뚫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기억의 문제인지 아니면 전시유물이 방대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매주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지는 듯했다. 그 때문에 박물관을 계속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했던 곳은 1985년 문을 연 월지관이었다. 물론 그때는 안압지관이라 불리던 시절이다. 달의 정원, 월지는 문무왕 14년(67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동궁 안의 인공 연못인데 경주박물관에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할 정도로 아주 특별한 공간이었다. 전시된 유물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단연 나무배였다. 길이가 6.2m에 이르는 나무배가 전시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나무배를 발견하게 된 그 과정도 매우 흥미롭다.
1974년 경주종합개발계획의 하나로 월지를 준설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다. 그 이듬해인 1975년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해 마침내 월지관에서 가장 빛나는 유물이 된 나무배를 비롯해 금동여래입상, 기와 같은 유물 1만 8천여 점을 만나게 되었다. 월지에는 원래 3개의 섬이 있었다. 그곳에는 진귀한 동물과 새가 가득했다. 월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이면서 식물원이자 동물원이었던 것이다. 실제 이를 증명하듯이 월지를 발굴할 때 포유동물의 뼈가 228점, 조류의 뼈가 14점이나 나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무배는 천년이 넘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놀라운 유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배의 발견은 연못 위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그 오랜 세월에도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무배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수십 명의 인부들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배를 옮기는 도중에 나무가 휘어져 토막이 나고 말았다. 지금이라면 조금은 달랐을까 싶기도 하다.
신라의 유물은 기록유산이 남아 있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유물이 말해 주는 그 당시의 시대상과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땅 속에 오랫동안 박제되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그 옛날 세상 밖으로 나왔더라면 유물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휘둘려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월지의 유물이 말해주는 신라의 이야기를 영영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월지가 폐허로 변해 갈대만 무성해지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러면서 불리게 된 이름이 바로 안압지(雁鴨池)였다. 그 시절 비록 옛 영광은 사라졌다고 할지라도 얼마나 낭만적인 풍경이었겠는가. 그렇게 안압지로 불리다가 2011년이 되어서야 신라 때 불리던 월지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게 된 것이다.
누군가 이름을 함부로 짓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름이란 그만큼 중요한데 요즘 보면 월지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대표적 공간이다. 사실 월지의 백미는 야경에 있다. 낮의 월지가 여느 궁궐의 뜰이라면 밤의 월지는 그 자체로 몽환적이고 화려하다. 연못에 어린 불빛은 달빛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아름답다. 특히 해가 지고 난 직후 하늘이 푸른빛으로 가득 차오르는 블루아워(Blue Hour)에는 누구나 월지의 순수한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월지의 매력은 순전히 물에서 시작된다. 낮에는 연못 위로 풍경이 담기지만 밤에는 오로지 빛만이 가득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월지에서 나온 유물만 본다면 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리면 된다. 굳이 월지를 찾을 일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낮의 월지는 조금은 평범하다. 하지만 밤의 월지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달의 연못에 나무배 하나를 띄우고 달빛을 마음껏 머금을 수 있는 낭만은 오로지 달의 정원, 월지에서만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