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빙고
고등학교 때 단짝이던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친구들하고
10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거든.
근데 약속장소가 석빙고야”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서 혼자 까르르하며 한참을 웃었다. 불과 몇 년 전인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한 약속이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면서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어디서 만날까를 한참 고민했는데
경주에 있는 많은 문화재 가운데 다른 건 몰라도
석빙고만은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거기서 만나자고 약속한 거지”
겨울철에 채취한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돌로 만든 창고, 석빙고!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 이사금 때,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6년(505) 11월에 얼음창고를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사실 처음에는 석빙고가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만 있는 줄 알았다. 경주에 산다는 게 그때는 나름 뿌듯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국 곳곳에 다 있었다. 대표적인 것만 꼽아도 안동석빙고(1737년, 영조 13년), 창녕석빙고(1742년, 영조 18년), 청도석빙고(1713년, 숙종 39년), 현풍석빙고(1730년, 영조 6년)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석빙고가 전국적으로 여러 개라는 사실에 살짝 실망하기도 했다. 심지어 경주석빙고 또한 조선시대 영조 14년(1738년)에 축조된 것이어서 전국에 있는 석빙고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니 말이다.
석빙고를 이렇게나 많이 만든 왕은 조선시대 숙종과 영조였다. 그렇지만 숙종이나 영조는 석빙고를 전국곳곳에 많이 만들 만큼 대식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 숙종과 영조는 소식가로 유명하다. 주로 즐겼던 음식도 우유를 섞어 쑨 타락죽(駝酪粥)이다. 특히 타락죽은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한 음식으로 소화기능이 좋지 않았던 영조에게는 딱이었다. 그 당시에도 석빙고는 우유처럼 상하기 쉬운 음식을 보관하기 위한 궁중의 생활필수품 같은 거라고나 할까. 전기도 없던 시절에 얼음을 보관하기 위한 천연냉장고를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으로도 정말 신기했다.
몇 해 전 5월 어느 날, 석빙고는 정말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직접 찾은 적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월성으로 향하는 길에는 이팝나무가 만개해 있었다. 정말 5월에는 하얀 꽃만 핀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다. 봄의 크리스마스처럼 멋진 풍경이었다. 마치 하얗게 눈꽃이 내린 것 같아 석빙고를 보러 가기에 딱 맞는 계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라의 궁궐터인 월성 안에는 모든 건물이 다 사라지고 이제 석빙고만 남았다. 어찌 되었든 천년의 약속을 지킨 유일한 문화재라 할만하다. 얼핏 보면 여느 고분과 비슷하다. 고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여러 과학적인 원리가 숨어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구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경주석빙고는 전체적으로 북쪽을 등지고 놓여 있는 모양인데 입구 쪽에는 기역자로 돌을 쌓아 바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뒀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튼튼하기는 하지만 햇살을 받으면 쉽게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지붕 위에는 흙과 잔디를 덮어 열을 차단했다. 뿐만 아니라 높아진 열기가 천장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3개의 환기구까지 만들었다. 환기구는 이슬이나 비를 막을 수 있는 큰 돌까지 덮어 마무리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북쪽에 만들어 공기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온도변화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한 점도 눈에 띄었다.
정말 석빙고는 냉장고라 할 만큼 시원할지 궁금했다. 석빙고 안으로 계단 한 개 정도를 내려갔더니 실제 바깥과는 다른 차가운 바람이 뿜어졌다. 그늘진 곳이라서가 아니라 석빙고 안에 냉기가 갇혀 있다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석빙고의 천장 쪽은 무지개처럼 둥글게 만든 홍예가 다섯 개나 있어 상당히 넓었다. 그건 마치 현대식 대형 터널처럼 보였다. 그 이름 그대로 바닥과 천장에 남아 있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마치 무지개처럼 영롱했다. 바닥은 이끼 때문인지 옅은 옥색을 띠고 있었고 천장 쪽은 안으로 갈수록 점점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여기에 홍예 구조까지 더해지니 가히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무지개라 할만했다.
시간이 흘러도 꼭 지켜야 하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물론 신라 때 만든 석빙고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도 생각한다. 그랬다면 천년이 가도 변함없을 문화재로 당당하게 이름을 날렸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다시 천년을 지켜낸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중학생일 때는 10년이란 세월이 까마득하게 먼 미래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한 지도 40년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세월이 빠른 건지 우리의 기억이 흐릿한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살면서 가끔 석빙고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그 친구들의 약속을 떠올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0년 후, 20대 중반의 푸른 청춘들은 정말 석빙고에서 다시 만났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그 약속마저도 세월 속에 냉동돼 버렸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너무 바쁜 인생을 살아왔으니 만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았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언젠가 다시 친구들과 만나게 되면 그때의 청춘이 그대로 보관된 것처럼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인간에게도 시간을 꽁꽁 얼려버리는 창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