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
학창 시절, 친구랑 반월성에서 자전거를 탄 적이 있다. 우리는 인근의 첨성대를 지나 계림을 둘러본 다음 자전거를 끌고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는 반월성으로 갔다. 반월성은 신라의 궁궐터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울창한 숲 속에 펼쳐진 넓고 푸른 잔디밭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자전거를 몇 바퀴나 돌았다. 그렇게 신나게 자전거를 탔던 그날을 생각해 보면 친구의 얼굴 표정까지도 아직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2011년 반월성은 월성이라는 신라 때의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월성이 아닌 반월성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옛 추억으로 박제돼 있다.
월성을 보면 ‘경주는 곡선의 도시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전체가 초승달이기도 하지만 밖에서 바라본 월성은 크고 작은 고분이 연이어 붙어있는 듯한 모습이다. 어느 왕가의 아름다운 뜰을 거니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사실 월성은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늘 보던 일상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경주를 떠난 이후에는 월성에 올라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 경주 속에서도 경주와 멀어지는 정말 이상한 상황에 놓여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경주는 나에게 익숙한 듯 낯선 관광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 스스로 관광객이 된 기분이 들 때도 자주 있었다. 그러는 사이 경주는 점점 쇄락해 갔고 그 옛날의 화려했던 시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린 시절 내가 알던 경주는 없고 모든 게 낡아버린 느낌이었다. 아마 경주의 그 모든 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경주와 너무 멀어져 있었다.
나지막한 경주 도심보다 조금 높이 있을 뿐 전체적으로는 너무나 평안해 보이는 언덕 위의 월성! 그것만으로도 멋스러운 곳이다. 월성은 둘레가 약 2400m, 동서로는 900m, 남북으로는 260m나 되고 면적은 약 19만 3845㎡에 이르는 세상에서 가장 큰 달이었다. 동시에 달 속에 지어놓은 꿈의 궁전이었다. 여러 개의 문과 누각을 거느린 건물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 많던 건물이 모두 사라져 그때의 영광을 찾아볼 길이 없다.
그 시절 우리에게 월성은 그저 초록의 공간이었다. 언제까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곳이었다. 월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아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언제든 땅을 파기만 하면 엄청난 유물이 쏟아지고 유적이 드러나는 곳이어서 정말 만반의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발굴조사를 시작할 거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적어도 50년이나 100년이 흐른 후에 조사를 한 거라는 얘기였다. 그래서인지 2014년 월성지구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생각보다 빠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월성의 발굴조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우리의 역사는 땅 위에서 이뤄졌지만 발굴의 시간은 우리의 발아래 있다. 그래서 아주 더디고 조심스럽다. 월성 안에 있던 5개의 문과 4개의 누각, 왕의 집무실인 남당, 조원전, 내성이 모두 사라진 흔적을 찾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요즘에는 레이더를 이용해 발굴한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들었지만 그것 역시 파묻힌 역사를 조심스레 더듬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먼지 하나 티끌 하나를 걷어내는 과정일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분명 실재했던 것을 찾는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 비록 문화재 발굴이라 하더라도 상상력 없이 가능할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모든 복원의 역사가 그러하다. 사진이나 정확한 설계도가 있지 않는 이상 적어도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전의 구조물을 어떻게 완벽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사실 알고 보면 완벽한 복원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쩌겠는가. 지나간 시간을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 후손에게 남겨주기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복원을 할 때면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당시 사람들의 삶, 철학, 이야기, 거기에 시대적 상황에 대한 상상력이 어쩔 수 없이 더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다시 찾은 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월성으로 이어진 길은 내가 어릴 때에도 굵은 모래가 듬성듬성 섞인 마사토였다. 그 흙길 그대로였다. 그 순간 월성도 옛 모습 그대로일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잠시 후에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 옛날 푸른 잔디밭이 아닌 발굴조사를 위한 파란 천막이었다.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정말 변한 게 없었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차양막 아래 일렬로 앉아 아주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땅을 쓸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런 속도라면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걸릴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월성에는 해자도 복원되어 있었다. 사실 월성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궁궐터로 알려져 있다. 궁궐의 남쪽은 자연해자의 역할을 하는 남천이 흐르고 있어 별도로 만들 필요가 없지만 그 밖의 동쪽, 서쪽, 북쪽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궁궐을 지키기 위한 방어시설이 필요한 구조이다. 그렇게 해서 신라는 월성의 3면에 물길을 이용한 해자를 만들게 되었고 관리가 어려워진 후에는 일부 해자를 메워버리거나 돌을 이용한 석축을 쌓았다.
월성 안의 언덕 위에 올라서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북쪽의 해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시설이라기보다는 그저 봄의 기운이 가득한 물의 정원처럼 느껴졌다. 실제 삼국통일 후 전쟁은 끝이 났고 월성에도 평화가 찾아왔을 것이다. 그 시절 월성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또 얼마나 낭만적이었을까. 경주의 낮고도 차분한 도심도 보였다. 신라의 화려했던 시절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언젠가 오래전 그 친구를 다시 만나 달빛이 내려앉은 월성의 궁궐에서 밤나들이할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