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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해바다를 사랑한 왕

신라 제49대 헌강왕(?~886년)

by 작가의숲

1998년, 내가 울산을 찾았을 때 처용문화제는 이미 지역축제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 배운 <처용가>에 나오는 그 처용을 명칭으로 하는 축제라는 게 조금은 특이했다.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사실 처용문화제의 원래 명칭은 울산공업축제였다. 울산공업축제가 제29회를 맞이하던 1995년 그 명칭을 바꾸면서 처용문화제가 되었다.


사실 울산공업축제의 시작은 울산의 산업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1967년 4월 20일 울산에 특정공업도시 지정을 기념하는 상징물인 ‘공업탑이 세워졌다. 동시에 이를 기념하는 제1회 울산공업축제가 열린 것이다. 처음에는 ’ 공업‘이 어떻게 축제의 이름이 되고 주제가 되었나 싶어 의아했다.


그런데 울산의 산업화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울산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조건과 빼어난 풍광을 지닌 동해의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그 아름다운 해안가에서 중공업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걸 이뤄낸 사람들은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청년들이었다. 그때 당시 울산의 극장에서는 홍콩영화나 무협영화만이 흥행에 성공했다. 울산은 그 정도로 남성적인 도시였고 중공업 또한 비중이 높았다. 울산공업축제는 바로 노동자들을 위한 거였다. 울산공업축제는 사람들의 땀과 노력에 대한 작은 위로였고, 불빛이 꺼지지 않았던 공단을 배경으로 한 지역 맞춤형 축제였던 것이다.


공업축제를 시작한 지 30년이 가까워지던 그즈음 울산은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산업이라는 다소 딱딱한 이미지를 벗고 문화라는 또 다른 도시의 색깔을 입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만 해도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울산을 ’ 노동자들이 만든 땀과 노력의 도시‘가 아니라 그저 ’ 공해도시‘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시민들 또한 문화에 대한 갈증도 커졌다. 그러면서 울산문화예술회관이나 현대예술관 같은 문화공간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처용문화제로 돌아가 보면, 울산에서는 왜 처용을 지역축제의 이름으로 사용했던 것일까. 동경 밝은 달에로 시작되는 <처용가>를 보더라도 처용은 경주와 관련된 인물이다. 그럼에도 처용은 경주에서보다 울산에서 더 인기가 많다. 실제 울산지역 방송에서도 처용과 관련된 내용을 다룰 때가 많다. 처용문화제를 비롯해 처용암, 처용탈, 처용무, 심지어 처용탈을 만드는 장인까지 심심찮게 방송에 나온다. 처용이 이렇게나 울산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용(處容)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보면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개운포에 놀러 왔다는 기록이 있다. 왕이 돌아가려고 하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게 되는데 이 같은 일이 동해 용의 조화라는 얘기를 듣고 부근에 절을 지어주니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고 한다. 그리하여 개운포(開雲浦)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개운포는 울산 외황강 하구에 있는 작은 포구이다. 이에 동해의 용이 기뻐하면서 아들 일곱과 함께 왕의 앞에서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으며 그중 한 아들이 서라벌로 돌아와 왕을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었다. 생각해 보면 동해바다로 떠난 헌강왕의 특별한 행차, 그리고 처용과의 우연한 만남 자체가 하나의 운명적인 만남처럼 느껴진다.


경주에서 울산 남구 개운포까지 100리가 넘는 길이다. 그 먼 길을 행차했던 헌강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꽤 낭만적인 왕이었을 것이다. 동해바다를 유람 삼아 둘러보고 그러던 중 만난 처용을 직접 서라벌까지 부른 걸 보면 사람 보는 안목도 상당했을 것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 서라벌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고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고 했다. 헌강왕의 시대는 그야말로 태평성대였다. 춤과 음악, 문학과 이야기가 있는 시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경주의 여러 왕릉 중에서도 헌강왕릉을 꼭 한번 가고 싶었다. 울산 처용문화제를 가능하게 했던 신라의 왕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헌강왕은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로 유명한 경문왕의 아들이다. 그러면서 조금 더 궁금해진 것도 있었다.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통일전 인근 숲에 있는 헌강왕릉. 사실 그 길은 평소에도 수없이 오가는 곳이다. 개인적으로 왕릉에 가기 가장 완벽한 시간대가 있다. 오후 3~4시 무렵이다.


헌강왕릉으로 이어진 소나무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 소나무 사이로 황금빛이 된 햇살이 들어왔다. 이제 막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햇빛은 이미 노을처럼 약간 붉어진 상태였다. 편안했던 황금의 시대로 걸어가는 듯한 길, 왕릉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멀리 왕릉의 눈앞에 들어왔다. 비로소 왕릉으로 가는 길이 왜 굽어져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숨은 듯이 자리 잡은 왕릉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딱딱하거나 권위적이기보다는 조금은 인간적인 느낌이랄까. 왕릉의 무게감을 더해주는 곳은 4단으로 쌓아 올린 넓고 무직한 둘레석뿐이었다. 문득 헌강왕만큼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군주가 또 있을까 싶었다. 그 옛날 개운포에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맑아졌듯이 햇살은 헌강왕릉에서 내려오는 내내 나지막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나에게 헌강왕은 동해바다를 사랑한 왕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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