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27대 선덕여왕(?~647년)
선덕여왕은 지혜로운 왕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왕이 미리 알고 있었던 세 가지’에 대해 적고 있다.
선덕여왕은 당나라 태종이 모란을 그린 그림과 씨앗을 보내며 배우자가 없는 자신을 희롱했지만 그 뜻을 미리 알고 의연하게 대처했으며, 서라벌 개구리가 우는 것을 들은 후 여근곡에 백제의 군사가 습격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하들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낭산 남쪽에 있는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는 말을 남겼다. 앞서 두 가지는 선견지명이라기보다는 나라 안팎의 정치상황에 대한 빠른 상황판단이었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리천에 가겠다고 한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담긴 유언이었을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볼 때 세계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다. 수미산 정상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각각 여덟 개씩의 하늘이 있고 그 중앙에는 제석천(帝釋天, 산스크리트어: Śakra)이 있으니 이를 모두 더하면 33천이 된다. 그곳이 바로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는 이상세계인 도리천(忉利天)이다. 도리천에 있는 천인들의 수명은 1,000년이고 도리천에서의 하루는 인간 세상의 100년에 해당한다. 선덕여왕은 스스로 도리천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했을 것이고 신하들에게 자신이 사후에 머물 곳을 미리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덕여왕이 있는 낭산의 도리천으로 가는 길,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고요했다. 새해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찾는 이들이 아예 없었다. 하늘 끝까지 뻗은 소나무에 가려 햇살은 절반으로 토막 나 있었다. 중간중간에는 심하게 굽은 소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이로 난 숲길에는 솔가리가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눈이 내리고 난 이른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마당을 걷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설령 누군가 그 길을 다녀갔다고 해도 사람의 발자국을 전혀 내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마침내 만나게 된 선덕여왕의 도리천, 너무나 아늑했다. 그리고 한없이 소박했다. 신라의 어느 왕이 이토록 자연스러운 공간을 좋아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화려한 모습일 거라는 처음의 예상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두세 단으로 쌓아 올린 둘레석마저 자연석이다. 그런데도 돌을 감싼 청록색의 이끼가 주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왕릉 주변에 있는 소나무는 그 어느 왕릉보다도 빼곡했다. 주변의 거의 모든 소나무는 왕릉을 향해 예를 갖추듯, 거친 비바람으로부터 여왕을 감싸듯 커다란 우산처럼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사실 선덕여왕에게 불교는 모태신앙에 가깝다. 그에게 불교는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삶 그 자체였고 통치의 근간이었다. 실제 선덕여왕은 분황사,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우며 신라시대 가장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군주였다. 고대 인도 샤캬 부족의 소왕국이었던 카필라국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로 태어난 석가모니의 아버지는 정반왕이었고. 어머니가 바로 마야부인이었다. 신라의 공주 ‘덕만’이었던 선덕여왕 또한 아버지는 신라의 진평왕이었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었다. 이런 걸 평행이론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 끝에 다시 한번 둘러본 선덕여왕릉은 여기가 정말 천상의 중심에 있다는 도리천인가 싶을 정도로 평온하다. 신라시대 왕릉 대부분이 나지막한 평지에 있는 것과 비교해 봐도 결코 낮지 않다. 낮지만 높은 자리, 땅이지만 하늘 같은 곳, 죽음이지만 삶 같은 곳이었다. 그때 문득 석가모니가 여든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면서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 생각났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아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독립적인 삶, 자신 안에서 빛을 내며 스스로를 등불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 그 안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찾았던 삶. 그것이 그의 삶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에게 도리천은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그 이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을까. 그는 죽음 또한 아름다운 삶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리천에 핀 아름다운 모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