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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왕을 쩔쩔매게 한 비밀

신라 제48대 경문왕(846년~875년)

by 작가의숲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인간의 ‘입’이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너한테만 이야기하는 거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이렇게 해서 지켜지는 비밀은 이 세상에 없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 비밀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그렇게 봉인이 해제된다면 수천 명이 알게 되는 것도 결국 시간문제다. 그런데 사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분명 자신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세상에 알려졌다면 그걸 말한 사람은 단 한 명, 자기 자신뿐이다. 말한 대상이 설령 대나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어릴 때 들었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가 바로 그런 경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의 왕은 당나귀처럼 길게 생긴 자신의 귀를 감추고 있었다. 왕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모자를 만드는 장인뿐이었다. 그는 왕의 비밀을 죽을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지킨 충직한 신하였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대나무 숲에서 혼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그만 외치고 말았다. 그 후 바람만 불면 대나무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고, 왕은 결국 대나무마저 모두 베어버리고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자 '임금님 귀는 길다'라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결국 입 밖을 나온 비밀은 다시 숨길 수 없다. 와전되면서 일파만파 더 멀리 퍼져나갈 뿐이다.


이런 흥미로운 설화는 사실 전 세계 곳곳에 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다스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아폴로의 노여움을 사 당나귀 귀를 갖게 되자 모자로 자신의 귀를 가리기에 바빴다. 미다스의 이런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그의 이발사뿐이었다. 이발사 역시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땅에 구멍을 파고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한 뒤 흙을 덮었다. 하지만 그곳에 갈대가 자라자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리게 된 것이다.


똑같은 듯 다른 이들 설화에는 재밌는 요소가 너무 많다. 왕이나 신화에 관련된 이야기라서 그 자체로 충분히 흥미롭다. 또한 비밀에 관한 내용이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등장인물의 상황을 커다란 귀를 가진 당나귀에 비유한 것도 너무나 절묘하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요소만 있다면 완벽에 가깝다. 그건 바로 이야기와 관련된 공간이다.


2023년 11월, 옛 동해남부선의 불국사역 인근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커다란 이정표가 세워졌다. 그 바로 뒤편으로는 작지만 약간의 대나무 숲도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뜬금없이 왜 이런 조형물이 들어섰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근 구정로터리에 있는 ‘방형분(方形墳)’과 관련이 있었다.


방형분은 말 그대로 원형이 아닌 네모난 형태의 무덤이다. 신라 무덤 중 유일한 네모난 무덤, 둘레석에는 12 지신상이 있어 전체적으로 정갈하다. 무덤 안을 볼 수 있는 일종의 출입문도 있고 그 안에서는 금동관 장신구와 은제 띠고리도 나왔다. 그러니 예사 무덤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봐도 왕의 무덤은 아닌 것 같아서 ‘왕릉’이 아닌 ‘분(墳)’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곳이다. 그저 통일신라 말기 최고 귀족층이라면 이 정도의 무덤은 썼을 것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는 방형분을 지나 집으로 오는 경우도 꽤 많았다. 그런 나의 기억 속에서도 방형분은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물론 방형분의 주인을 제44대 민애왕, 제48대 경문왕, 제54대 경명왕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중 무덤의 주인이었으면 하는 왕이 경문왕이다. 경문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단 1%만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경문왕은 삼국유사 속에 나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재밌는 이야기를 원한다. 그것이 비록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역사를 다룬 삼국사기보다 야사를 기록한 삼국유사가 더 재밌다. 그래서 ‘옛날 옛날에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귀가 솔깃해진다. 더구나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을 쩔쩔매게 하는 비밀이라면, 대나무 숲이 들려주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면 그때 당시 백성들 또한 얼마나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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