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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유리천장을 깬 여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647년)

by 작가의숲

고등학교 시절, 공부보다 더 힘들었던 건 무용시간이었다. 춤과 노래에 재주가 없어 학창 시절 내내 음치, 몸치로 사느라 음악시간과 체육시간이 가장 곤혹스러웠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무용시간까지 날 괴롭혔다. 600명에 가까운 1학년 학생들이 무용을 반드시 배워야 했던 이유는 신라문화제 때문이었다. 그 당시 경주에 있던 고등학교는 예외 없이 개막식에 총동원됐다. 남자고등학교의 경우에는 신라복식을 입고 거리퍼레이드와 가장행렬에 서야 했고,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은 단체 공연을 펼쳐야 했다.


우리 학교의 공연이 바로 ‘가배놀이’였다. 가배(嘉俳)는 1세기 초 유리이사금 때부터 음력 7월에서 8월 한가위까지 여인들이 편을 갈라하던 일종의 길쌈놀이였다. 그 가배놀이를 왜 하필 우리 학년이 하고 있나 싶었다. 1976년 제15회 신라문화제 때 우리 학교 선배들이 첫선을 보인 게 발단이었다. 그 이후 '경상북도 민속상비군'으로 선정돼 우리가 그 고생 아닌 고생을 일 년 내내 한 것이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건 1학년 때 가배놀이를 배운 학생들이 2학년 때도 동원됐다. 해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건 너무 무리다 싶었을 거다. 효율도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격년제의 희생양이 되었다.


가배놀이 공연 준비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우선 10 학급의 모든 학생들이 무용시간마다 한 가지씩의 손동작을 섬세하게 배워나갔다. 한국무용의 특성상 선이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적성에도 전혀 안 맞았다. 어쨌든 그렇게 기본동작을 익힌 다음 1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1학년 전체가 운동장에 모여 동작을 맞춰보게 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개막식에 맞춰 다른 학교 학생들과 손발을 맞춰야 하고 마지막으로 황성공원에 있는 종합운동장에서 최종 리허설을 거쳐야 했다. 그래야 큰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한 번은 땡볕에서 연습할 때였다. 키가 크고 바짝 마른 친구 한 명이 일사병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친구를 옮기고 계속 연습을 이어간 것 같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맹훈련이었다. 전장에서 전우가 쓰러져도 계속 적과 싸워야 하듯이 말이다. 놀이라는 이름의 노동 같았던 그때의 기억 속에 정말 부러웠던 한 사람이 있다. 1학년 전체가 예외 없이 동원된 가배놀이에서 제외된 채 그저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단 한 사람, 그가 바로 여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소중한 여고시절의 추억이다. 그리고 그때 가배놀이를 지켜보던 왕은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의 여왕이 된 제27대 선덕여왕이었을 것이다. 혹은 그의 재연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우리가 아는 제27대 선덕여왕에 별도로 ‘여왕’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그저 선덕왕(善德王)으로만 적고 있다. 남자인 제37대 선덕왕(宣德王)과는 단지 한자만 다를 뿐이다. 말하자면 동명이인인 셈이다. 이 두 왕을 구분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제27대 선덕왕을 선덕여왕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 당시엔 ‘여왕’이라는 말을 굳이 붙이지 않았다.


그건 결국 성별이 왕좌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건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왕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계급이다. 더 정확히는 '성골'이면 된다. 성골은 왕족 간의 혼인으로 탄생하며 성골 출신이면 성별에 관계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근거는 학창 시절에 열심히 외웠던 ‘골품제’에 있다. 귀족을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여성이라도 성골 출신이라면 얼마든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골품제는 신라시대에 선덕여왕뿐 아니라 제28대 진덕여왕, 제51대 진성여왕까지 총 세 명의 여왕이 나온 이유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운명적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혁신적이다, 어쩌면 가부장적인 유교문화가 만연했던 조선시대보다, 남아선호 사상이 많은 여성들을 힘들게 했던 근대보다 더 파격적이고 평등하다. 쉽게 믿기지는 않지만, 신라시대에는 비록 여성이라 하더라도 재산을 가지거나 상속을 받거나 혹은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는 것도 가능했다. 비록 시작은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은 나름 공정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조선의 여인들은 때론 그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주체적인 삶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의 삶에 종속되기 일쑤였고 양반사회가 낳은 사회적 약자이기도 했다. 그런 많은 희생 속에도 불구하고 행동에 더 많은 제약을 받았으며 더 많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신라의 사회적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온실 속에 갇히기보다는 유리천장을 뚫는 여성들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선덕여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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