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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연꽃으로 피어난 왕

신라 제38대 원성왕(730년대 추정~799년)

by 작가의숲

왕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었다. 그래도 웅장한 느낌은 가득했다. 완만하게 이어진 길인데도 위엄이 있고 그러면서도 권위적이지 않은 느낌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신라의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원성왕릉을 보는 순간 갑자기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살아서도 그러지 않았을까. 기근이 들었을 때는 기꺼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걸로 봐서는 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꽤 많은 관심을 가진 듯하다. 관리를 뽑을 때도 활쏘기로 시험 치르는 대신 논어나 예기 같은 유학 서적의 독해 수준에 따라 등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했다. 요즘으로 치면 문해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 관리채용에 이해능력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왕릉도 딱 그런 느낌이었다. 전체적인 배치와 구도의 자연스러운 느낌, 무엇보다 마을과 들판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도 참 좋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왕릉은 12 지신상으로 왕관을 두른 듯하다. 봉분의 높이가 약 6m에 이르고 둘레도 23m나 된다. 둘레석의 높이도 1.4m에 이른다. 입구에서 직선으로 봉분 앞까지 걸어가면 가장 먼저 참배객을 맞이하는 것은 12 지신상 중 재단과 가장 가까운 남쪽에 있는 말 지신상이다. 오히려 재단이 빗겨 나 있는 형상이다. 북쪽을 상징하는 쥐 지신상은 왕릉의 맨 뒤편 중앙에 있다.


그런데 원성왕릉의 진짜 비밀은 봉분 속에 있다. 왕릉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동곡사라는 절이 있었다. 798년 12월에 원성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 절을 1.8km 정도 떨어진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로 옮기고 절터에 있던 작은 연못 위에 왕의 능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면 이런 경우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굳이 이해하려면 뭔가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역사에는 사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원래 있던 연못을 메우지 않고 그대로 무덤을 쓴다면 기존의 방식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관을 걸어 겨우 유해를 안치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 경주부에서 간행한 일종의 향토 지리지인『동경잡기(東京雜記)』(1669년)에 이런 내용이 남아 있다.


괘릉은 경주부 동쪽 35리에 있는데 어느 왕의 능인지 알 수 없다.

민간에 널리 전하기를 물속에 장사 지냈는데

널을 돌 위에 걸고 흙을 쌓아 능을 만들었으므로 이름이 된 것이다.

석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출처 :『동경잡기(東京雜記)』


그렇다면 여기가 진짜 원성왕릉이 맞는 것일까. 이럴 때마다 등장하는 비슷한 듯 서로 다른 두 개의 역사책이 있다. 그건 바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 1145년에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이 엮은 것으로 알려진『삼국유사』이다. 둘 다 신라를 중심으로 적은 기록이니 만큼 기대해 볼만하다. 그렇다면 이 두 권의 역사서에는 괘릉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원성왕이 재위 14년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출처 :『삼국사기(三國史記)』


역사의 기록은 참 냉정하고 불친절하다. 원성왕 사후에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했는지는 없다.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하고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

출처 :『삼국유사(三國遺事)』


여기서 말하는 숭복사는 동곡사가 자리를 옮긴 후 고쳐 부른 이름인데 훗날 절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경주시 외동읍에 그 절터가 남아 있다. 이런저런 서적을 근거로 괘릉을 원성왕릉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1916년 경주를 찾은 일본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는 괘릉 앞에 '문무왕릉’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건 또 어찌 된 일인가. 삼국사기에는 분명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유해를 동해 바다에 뿌렸다는 기록이 있고 이를 근거로 우리는 해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바닷속에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괘릉에는 왜 문무왕릉 관련 표지가 있었던 것일까. 그건 실제 능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기 위한 일종의 가묘라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원성왕릉 또한 문무대왕의 수중릉처럼 조성 당시에는 일종의 수중릉이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원성왕릉에 가면 꼭 왕릉을 등지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잠시라도 바라봐야 한다. 속이 후련해질 정도의 장관이기 때문이다. 평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지평선 끝까지라도 볼 수 있는 탁 트인 전망을 만날 수 있다. 왕릉 입구에서 보면 능이 눈높이에 있는데도 천상으로 이어진 느낌이 들고, 왕릉 바로 앞에서 보면 결코 높지 않는데도 만천하가 훤히 다 보이는 느낌이다. 일종의 착시현상 같은 그런 기묘한 분위기가 있다. 왕릉으로 삼을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동곡사를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썼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원성왕과 불교의 인연을 생각했지만 막상 원성왕릉에 왔을 때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게 원성왕릉은 마치 작은 연못 위에 피어난 연꽃처럼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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