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38대 원성왕(730년대 추정~799년)
괘릉은 왕릉의 이름치고는 참 독특하다. 지금은 원성왕릉으로 불리지만 나는 괘릉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다. 명칭과 호칭의 차이라고나 할까. 경주에서 왕릉의 이름을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괘릉은 예외다. 지금도 주소며 마을이며 초등학교 이름 앞에 모두 괘릉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원성왕릉이라 쓰고 괘릉이라 부르는 편이다. 더구나 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오래된 표지판 역시 ‘괘릉’이라는 두 글자가 당당하게 적혀 있다.
스물한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였지만 그때 처음으로 오빠 손에 이끌려 원성왕릉을 찾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사진을 찍느라 꽤 머물렀다. 아직도 당시 사자상과 무인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색다른 느낌이 든다. 그런데 정작 왕릉을 배경으로 한 사진은 단 하나도 없다. 사진이 말해주는 추억으로만 보면 왕릉 가까이 갔는지도 의문스러울 정도다.
젊은 날의 추억을 가득 안고 다시 찾은 원성왕릉. 숲길은 여전히 유려하다. 그저 아름답다고만 말하면 표현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품이 넘치는 숲이다. 소나무 숲이라 그 어느 계절에 가도 좋지만 하루 중에는 오후 서너 시쯤에 가는 게 제일 운치 있다. 해가 서산을 넘어갈 무렵 길게 늘어진 햇살이 소나무 길에 드리워지는 바로 그 시간이 한없이 좋다. 뭔가에 홀린 듯이 가게 되는 그런 길이다. 원성왕릉으로 가는 길은 마치 물길을 따라가는 듯하다. 돛단배를 타고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바람을 따라 휘돌아나가면 그곳이 바로 원성왕릉이다.
아무리 산세를 보는 눈이 없다고 하더라도 왕릉에 다다르면 그 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소나무 숲이 끝나고 괘릉초등학교 가기 직전에 왕릉이 있다. 입구부터가 그 어떤 막힘도 없다는 데 놀랐다. 그리고 능이 그렇게나 멀리 자리 잡은 줄은 미처 몰랐다. 너무나 깊은 곳이었다. 누구라도 그 위엄에 완전히 압도될 정도로 말이다.
더구나 능역을 표시하는 돌기둥(화표석)을 시작으로 무인상, 문인상, 두 개의 돌사자상이 좌우대칭으로 놓여 있어 여러 개의 관문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배치를 보면 흥미롭다. 돌기둥을 지난 후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무인상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다. 사찰 입구에 있는 사천왕상과 비슷한 부리부리한 눈에 수염까지 있어 무척이나 이국적이다. 옷소매를 한껏 걷어 올린 채 칼까지 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개를 입구 쪽으로 돌려 주변에 대한 경계를 한시도 놓치지 않고 있다. 아주 역동적이다.
무인상 바로 옆에 있는 문인상도 예사롭지 않다. 예리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함부로 말을 붙이기 어려울 정도이다. 더구나 흐트러짐 없는 바른 자세이지만 옷 속에는 칼을 숨기고 있다. 무인상 못지않은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힘이 아닌 표정이나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한다고나 할까. 오히려 무인상보다 조금 더 긴장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리는 곳은 사자상이다. 일단 표정부터가 너무 재밌다. 왼쪽에 있는 첫 번째 사자상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다. 반면에 맞은편 사자는 정면을 바라보며 진지하다. 그런데 오른쪽의 맨 안쪽에 있는 사자는 왕릉 쪽을 보며 정말 활짝 웃는 모습이다. 전체 석물 가운데 유일하게 왕릉을 바라보고 있는 데다 너무 환한 표정이라서 차라리 귀엽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더 재밌는 건 왼쪽 앞발을 살짝 들어 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달려갈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는 거다.
어쩌면 이렇게도 멋지게 배치를 했을까 싶어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에 맞는 자세와 표정으로 왕릉을 지키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입구에 서 있는 무인상은 2개의 기단 위에 올라서서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다. 옷차림이나 자세 또한 아주 독특하고 이국적이다.
실제 이곳 무인상은 동아시아의 서쪽지역에서 온 사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당시 신라를 오가던 아라비아 상인의 모습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서역인을 모델로 한 무인상은 곱슬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서 있는 모습 자체도 아주 이채롭다. 상체를 돌려 입구 쪽으로 향하면서도 서 있는 자세에 흔들림이 없다. 이런 매력 때문에 무인상은 원성왕만큼이나 인기가 많다. 어쨌든 오래 전의 추억 때문이었을까. 다시 찾은 원성왕릉에서도 서역인을 닮은 무인상이 그중 가장 반가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