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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여섯 살에 짊어진 왕관의 무게

신라 제32대 효소왕(687년~702년)

by 작가의숲

2023년 4월, 어린 시절 소풍을 갔던 왕릉을 다시 한번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모처럼 미세먼지도 그리 많지 않아 하늘빛이 좋았다. 바람도 적당했다. 경주의 봄을 느끼기에 그저 그만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등나무의 보랏빛 꽃이 드리워진 골목을 따라 왕릉으로 향했다. 처음 왕릉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작이 어디인지 조금은 헷갈릴 수도 있는 길이겠다 싶었다. 나에게는 그것도 나름 묘미였다. 전혀 알 수 없는 숨겨진 시간 속으로 걸어가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좁은 길을 따라 100m 남짓 갔을까. 2021년 12월 폐선된 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옛 동해남부선을 만났다. 대부분의 동해남부선 구간은 이미 선로를 걷어냈지만 이곳은 활용방안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아 잠시 기다리는 중이다. 어린 시절 기차가 지날 때면 향나무 울타리 너머 길게 목을 빼고 차량이 몇 칸인지를 헤아리곤 했다. 원유나 석탄을 수송하던 화물열차의 경우 길게는 서른 칸이 넘을 때도 많았다. 바로 그 기차가 지나던 길을 만난 것이다.


그렇게 폐선로 위에 올라서자마자 얼마 전 단장한 것 같은 왕릉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게 뻗은 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왕릉을 감싸고 있었다. 왕릉 주변에 있는 소나무는 왕 못지않은 품격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목이나 잡풀과 다투며 복잡하게 엉켜 있는 여느 야산의 소나무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하늘 위로 높게 뻗어 올라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왕을 호위하되 가로막거나 가리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건 마치 숲의 궁궐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런 소나무 숲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그 안에 왕릉이 있기 때문이다.

숲 속에 자리한 두 왕릉의 주인은 제32대 효소왕과 제33대 성덕왕이다.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대왕의 손자이고 제31대 신문왕의 두 아들이다. 먼저 발길이 닿는 효소왕(재위 692~702)의 무덤은 이게 정말 왕릉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소박하다. 이렇다 할 특징도 없다. 원래는 가장자리에 자연석으로 된 둘레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왕릉이다, 왕릉이 아니다'를 두고 지금도 조금 다른 견해들이 있다.


효소왕은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어려도 너무 어린 나이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한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왕이 된 셈이다. 그 때문에 어머니인 신목왕후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효소왕이 즉위하기 16년 전 삼국이 통일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은 끝났고 아버지인 신문왕을 보필하던 연륜 있는 대신들은 기꺼이 어린 왕을 도왔을 것이다. 재위 초기부터 의학교육기관인 ‘의학(醫學)’을 설립하고 의학박사를 두어 중국의 여러 의학서를 가르친 걸 보면 백성들의 건강에 꽤나 관심을 가진 것 같다.


특히 695년에는 기존에 있던 동시전(東市典) 외에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까지 개설할 정도로 당시 신라의 시장경제에 대한 감각도 있었다. 또 698년에 일본의 사신을 접견하고 699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것으로 보아 주변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물론 어머니인 신목왕후의 정치 철학이 그대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섭정이 시작된 지 8년이 되던 700년 6월, 어머니인 신목왕후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효소왕의 나이는 열네 살에 불과했다. 아무리 신라시대라 하더라도 그 나이는 아직은 성인이 아닌 미성년자였다. 그리고 2년 후, 재위한 지 10년 만에 효소왕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렴청정을 빼고 나면 오롯이 왕권을 행사한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그때 나이 겨우 열여섯 살이었다.


사실 효소왕은 즉위하던 그해 아버지인 신문왕을 위해 황복사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니 부모를 향한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효소왕’이라는 그의 휘호를 보더라도 그의 지극한 효성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음에도 후대의 평가가 나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효소왕을 생각하면 힘겨운 삶이었을 것이다. 주도적인 삶도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시대의 왕들이 그러했겠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한 효소왕에게 왕관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을 테고 한 나라를 이끈다는 것도 태산처럼 큰일이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 되어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개인의 삶은 제대로 한번 꽃 피울 수도 없었다. 너무 일찍 시들어버렸다. 여느 여섯 살 아이처럼 마음껏 한번 뛰어놀지도 못한 채 말이다. 문득 그런 애달프고도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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