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문화유산답사기
나에게는 일종의 ‘추억 상실증’ 같은 게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기억 중에서도 특히 추억을 기억하기 어려운 증세라고나 할까. 어린 시절 어떤 친구들을 만나고 어떻게 학교생활을 했는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생활 6년은 머릿속에서 깡그리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심지어 가장 신나고 즐거워야 할 소풍마저도 내 기억 속에서는 지우개처럼 싹 지워지고 없다. 그래서 우리가 초등학교 때 어디로 소풍을 갔는지 주변 친구나 선후배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우리 학교의 주요 소풍 장소는 대체로 대여섯 곳 정도였다.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은 내가 다니던 내동초등학교에서 대략 6km 정도 떨어진 불국사였다. 1970년대 후반이던 그때는 그야말로 불국사의 전성기였다. 그 당시는 여행이라는 게 워낙 보편화되지 않던 때라 불국사 관광은 지금의 제주도 여행이나 해외여행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걸어가면 한두 시간은 족히 걸리지만 10리나 20리쯤은 예사로 걸어 다니던 시절이었기에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니 15리나 되는 불국사도 한걸음에 갈 수 있는 데였다. 더군다나 아이들이 일 년 중 가장 기다리는 소풍날이 아니던가.
또 다른 단골 장소는 영지(影池)였다. 영지는 당나라의 이름 없는 석공과 그의 아내(누이동생)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아내는 남편이 탑을 만들고 있던 불국사를 찾았지만 탑이 완성되면 그림자가 연못에 비칠 거라는 스님의 말을 듣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탑이 비칠 거라고 했던 바로 그 연못이 영지였다. 그리고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아내가 몸을 던졌다는 슬픈 설화가 전해지는 바로 그 연못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석가탑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는 뜻의 무영탑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훗날 현진건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무영탑'이라는 장편역사소설 속에서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로 거듭났다. 아무튼 이 영지마을은 우리 집에서 바라보면 들판을 가로질러 멀리 보이는 장소였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를 모를 때 영지는 그저 어느 동네에나 있는 흔한 저수지였다. 그런데 그곳에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을 때는 어린 마음에도 개연성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국사와 영지의 거리가 4.8km나 되는데 어떻게 석가탑의 그림자를 영지에서 볼 수 있겠는가. 물론 설화를 너무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바로 그 영지에 소풍을 가면 소나무 숲에서 김밥을 먹고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고 했다.
영지와 머지않은 곳에 있는 인근의 괘릉(지금의 원성왕릉)도 자주 찾던 곳이었다. 학교를 중심으로 시내 방향으로는 남산 자락의 서출지와 옥룡암이 주된 소풍장소였다. 이들 장소 역시 가려면 적어도 10리 이상은 걸어야 한다. 그 당시 시내에 자리한 중학교나 고등학교도 사정은 비슷했다. 반월성이나 첨성대, 월지, 그것도 아니면 황성공원이었다. 그래서 경주에 있는 거의 모든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소풍이라는 이름의 문화유산답사를 참 다양하게도 했다고 볼 수 있다.
내 기억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장 가까웠던 소풍장소는 바로 학교 옆 소나무 숲 속의 신라 왕룽이었다, 학교에서 아무리 멀리 잡아도 200m를 크게 넘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다 보니 소풍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게 없었다. 향나무로 된 학교 울타리 너머에는 동해남부선 기찻길이 있었다. 그 기찻길을 건너자마자 한눈에 들어오는 넓은 잔디밭이 바로 신라 왕릉이었다.
어린 마음에는 영 실망스러운 소풍이었을 것이다. 모처럼 나들이 기분을 내기에는 너무 가깝고 한 해 걸러 한 번씩 가는 곳이라 궁금할 것도 딱히 없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소풍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수건 돌리기와 보물 찾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시골 아이들에게 숲 속이 뭐 그리 신선하고 설레는 곳이겠는가. 게다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즈음에는 난로에 연료로 쓸 솔방울을 줍기 위해 찾았던 바로 그 노동의 현장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동네 뒷산과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넓은 잔디밭에 엄청나게 큰 무덤이 있었고 거기에는 잘 조각된 둘레석이 가지런히 봉분을 감싸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덤을 지키는 사자상도 네 개나 있었다. 그 사자상에 재미 삼아 오르기도 했고 걸터앉아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는 왕릉을 왕의 무덤이 아니라 그저 뛰어놀기 좋은 놀이터로만 여기던 시골 아이들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는 왕의 무덤, 왕의 정원, 왕의 숲으로 소풍을 가고 매일 그곳을 지나가거나 바라보며 일상이 소풍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경주가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역사의 도시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신라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바로 그 학교 옆 왕릉의 주인도 알고 보니 신라 제32대 효소왕과 제33대 성덕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