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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시간의 도시, 경주

프롤로그

by 작가의숲

옆집에는 머슴이 여럿 살고 있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그 집에 들어와 문간방에서 더부살이했다. 가을이면 마당 한가운데 볏짚으로 엮은 엄청난 크기의 뒤주를 몇 개나 만들어 그곳에 나락을 저장하던 그 부잣집에서 10년 넘도록 산 머슴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 집 옆에는 이 시대의 마지막 머슴이 살았고 그는 부잣집을 나온 후에도 이웃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다. 머슴은 엄연히 농촌에서 품삯을 받고 일하던 임금노동자로 1960년대에도 전국적으로 24만여 명이 있을 정도로 꽤 많았으니 어찌 보면 뭐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집 입구에는 아버지가 직접 만든 깊고 깊은 우물이 있었고 동네 사람들 몇몇은 저녁마다 물지게로 물을 길어 갔다. 바로 그 앞에는 디딜방앗간이 있어 동네 아낙들이 곡식을 찧으러 찾아오곤 했다. 우리 할머니는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 쓰던 곰방대로 담배를 태우시고 할아버지가 쓰시던 갓은 사랑채 벽장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조선시대 어느 산골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린 시절 내가 자란 우리 마을의 풍경이 이랬다. 그것도 보릿고개를 넘던 1960년대가 아니라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 후반에 말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너무 먼 옛날에서 온 사람처럼 살았다. 동갑내기인 부모님 두 분은 1934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셨고 아버지는 초등학교에 가기 전 3년 동안 서당을 다니셨다. 우리 엄마는 시집오기 전까지 동네 우물에서 새벽마다 물을 길어왔다고 했다. 낮에는 삼베를 짜고 밤에는 호롱불 아래에서 옷을 지으셨고 단옷날에는 창포물에 길게 땋은 머리를 감기도 했다.


마치 조선시대의 화가인 김홍도의 풍속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그렇게 사신 것 같았다. 나는 자라면서 그런 오래 전인 듯 아닌 이야기를 줄곧 들었다. 실제 우리 집에는 그와 관련된 유물도 상당했다. 베틀과 관련된 생활용품이나 마당에 까는 대형 멍석도 여러 개 있었다. 사극이나 대하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 집에서는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내가 태어난 경주는 유독 더 예스러운 도시기는 하다. 도시 어디를 가나 한옥이 있었고 집성촌도 많았다. 돌이켜 보면 내 고향 경주는 그때에도 이미 가장 역사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도시였다. 천년 동안 한 나라의 수도를 지낸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도 몇 안 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신기할 것도 없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 내가 바라본 경주는 전국에 있는 거의 모든 중⦁고등학생들이 찾는 최고의 수학여행지였다. 그때만 해도 해외여행이 일반화되지 않던 시절이라 제주도보다 더 인기가 많았던 곳이 바로 경주였다. 그 당시 신혼여행을 경주로 오는 경우가 많아 경주역이나 터미널 부근에서 양복을 차려입은 신랑과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신부가 나란히 걸어가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어디 노란 저고리에 빨간색 치마를 입은 신부뿐이었겠는가. 전국의 어르신들 역시 봄이나 가을이면 옥색 치마저고리를 곱게 입고 경주를 찾았다.


어디 그뿐인가. 경주는 가장 인문학적인 도시였다. 신라시대 유적이 도심 곳곳에 있었고 나는 매일 그 길을 따라 등교했다. 왕릉에서 친구들을 만나 산책을 하기도 했다. 발길 닿는 모든 곳에 천 년 이상 이어져 오고 있는 이야기가 있어 그 어디든 허투루 지나칠 수 없었다.


경주는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죽음의 도시 한가운데 우리의 삶이 있었다. 오래된 과거가 미래의 시간 속에 놓여 있는 도시이다. 그 안에는 문화와 역사, 창의적이고도 예술적인 공간, 시간의 흐름이 말해주는 신비로움, 삶의 철학까지 인간이 만든 다양한 분야가 모두 공존했다.


경주는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이미 찬란한 과거의 영광이 있었고, 나의 성장기에는 가장 빛나는 곳이었다. 늘 멈춰 있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무덤의 도시이지만 그곳에서 살아 숨 쉬는 문화가 있는 공간과 시간의 도시였다. 고향을 떠나며 그 시간을 잃어버렸고 마침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경주가 너무나 눈부신 도시라는 걸 다시 느끼게 되었다. 경주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기록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다시 경주를 천천히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만의 인문학을 이야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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