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인간의 마음, 에리히 프롬
유난히 힘겹게 넘어가는 책이 있다. 이런 녀석들은 전자책으로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역시 종이책을 읽어야 집중이 잘 되지~ 라며 책장을 팔랑대봐도 끝내는 모든 전의를 상실한 채 대청소 날 중고 서점으로 보내게 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길 바란다......)
내게는 단테의 『신곡』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인간의 마음』이 그러하다. 아니, 그러했다. 굳이 과거형으로 반복해 보는 이유는 최근에 이 삼대장 중 한 권을 완독 했기 때문이다. 그 계기는 필연인 듯 우연한 것이었다.
여행길에 반려 책을 데려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번 난징 때는 고민이 되었다. 중국으로 오면서 가져온 종이책은 진즉 다 읽어버리고 남은 건 『인간의 마음』뿐이었기 때문이다. 가져가자니 영 읽을 것 같지 않고, 두고 가자니 뭔가 아쉽고. 결국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망설이다가 한 장이라도 읽으면 이득이라는 생각으로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선 사실 일정 내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책이 불현듯 다시 떠오른 건 마지막 날 난징 대학살 희생자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곳에는 당시의 신문 기사가 갈무리되어 있다. 그중 가장 시선을 끌었던 것은 일본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 OO장교와 XX장교가 민간인과 포로를 죽이는 '살상 대회'를 열었다는 기사다.
말이 되는 얘기인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대회를 연다는 것이.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걸까, 또 이런 짓을 자랑스레 신문에 실을 만큼 한 집단의 도덕관념이 다 같이 삐뚤어질 수도 있는 것일까. 인간의 마음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궁금증이 책장을 넘기는 원동력이 되었다.
에리히 프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선과 악 중 하나만 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동물은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의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기에 그 행동이 옳다 나쁘다 말할 수 없다. 오직 인간 만이 악의를 품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악' 자체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고, 바꿔 말하면 조금도 악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세로선을 쭉 긋고 위쪽을 선, 아래쪽을 악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스펙트럼의 중간 어드매에 자리하는 것이다.
대신에 인간에게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선의 방향은 생존과 성장의 이미지, 그리고 악의 방향은 죽음과 쇠퇴의 이미지와 이어진다. 기본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자기 존재를 고집하려 하기에(『Ethica』 제3부, 명제 6), 죽음을 피하고 삶을 유지하려는 것이 본질이다.
사람의 본질이 착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고, 사랑도 미움도 아니며, 새로운 해결을 요구하고 또다시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내는 모순에 있다면 사실상 사람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해 퇴행적 방식이나 전진적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삶에 무관심한 사람은 죽음을 사랑하며, 악성적인 자아도취에 빠져 있고, 자신이 원래 속한 집단에만 병적으로 집착(근친상간적 유대)하게 된 끝에 악의 쪽으로 퇴행하게 된다. 프롬은 이를 '쇠퇴의 증후군'이라 부른다.
과거 난징에서 벌어졌던 일도 쇠퇴의 증후군이 전염병처럼 퍼진 결과라는 생각을 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는 선량한 사람이라도 죽음의 무력감과 체념의 기운에 잠식되기 쉬운 법이니까.
수많은 사람의 희생은 안중에도 없는, 죽음을 사랑하는 지도자의 결정으로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는 군사를 동원하고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우월하고 저들은 열등하다는 집단적 자아도취를 고양했을 것이다. '우리' 집단에만 초점을 맞추면 다른 이들은 철저히 남이 되고, 남의 고통 앞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눈 감을 수 있었으리라.
사실 이런 타자화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것 같다. 홀로코스트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이, 일본의 강제 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들이, 그리고 대학살 생존자들이 한 편에서 목소리를 낼 때면 지겹다고, 다 지난 일 뭘 자꾸 들추느냐는 목소리가 또 다른 편에서 들려오곤 하지 않는가.
기념관 한 켠 어두운 전시실 안에 대학살 생존자들의 사진이 뜨문뜨문 빛을 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꼭 이 비극이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잊혀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에리히 프롬은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될 기회를 갖고 생을 시작한다고 했다. 그리고 흔히들 잘못된 선택 하나로 인해 악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 채 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고 그것을 착실히 따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인즉슨, 악의 쪽으로 가다가도 옳은 선택을 하려는 노력만 있다면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러니 무엇보다도 선을 향하고자 할 때는 '각성'해야 한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어쩌면 대학살 기념관을 방문하여 희생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애도하는 이 시간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상 우리가 선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각성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가슴 아파하고 다른 사람의 친절한 시선, 새의 노래, 풀밭의 푸르름에 감동할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한다면 어떠한 각성도 우리를 도와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삶에 무관심하게 되면 이미 그가 선을 선택하리라는 희망은 없다.
공기마저 어두웠던 기념관을 지나 밖으로 나오자 4월의 봄햇살이 눈이 부시다. 옛날 수천 구의 시신이 매장된 곳에 세워진 공간인 만큼, 이런 극명한 대비도 의도가 반영된 설계가 아닐까 싶었다. "铭记历史 珍爱和平" —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지금의 평화를 소중히 해야 한다고. 나무의 싱그러움과 부드러운 바람결에 새삼 감탄하며,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나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