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일 잘하는 방법
처음 회사에 들어가면 누구나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한다. 내 한 몸 바쳐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임하게 된다. 나 역시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 선배들 쓰레기통 다 비워주고 같은 층 사람들 모두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남의 쓰레기통 비우기는 의미없는 짓이었지만 그만큼 잘 해보고 싶은 생각시 컸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그런 초심은 쓱 사라져버린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고, 야근이 있는 날은 한숨부터 나왔다.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타성에 젖어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만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간사하기 그지 없어서 내 편안함, 안락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추앙받던 지도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초심을 잃고 타락하는 지도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한 국가를 나락으로 이끌고 말았다.
짐바브웨라는 나라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내륙국이다. 이 나라는 십 여 년 전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유명세를 탔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2008년 4분기에만 물가가 무려 7.3 × 10의 22승 배가 올랐다. 730해 퍼센트가 오른 것이다. 100조 달러 지폐까지 찍어냈지만 이 지폐로는 계란 한 판 사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게한 장본인이 누구일까? 그 장본인은 바로 로버트 무가베라는 사람이다.
1980년 이전까지 짐바브웨는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식민지 때부터 정착한 소수 백인 지배층들이 다스리던 국가였다. 국민의 대다수였던 흑인들은 압제와 착취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 때 무가베가 등장한다. 그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이후 남아공에 대학교를 졸업했다. 당시에 보기 드믄 엘리트였던 셈이다.
그는 짐바브웨, 남아공에서 백인 정권 아래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흑인들의 실상에 눈을 뜨게 된다. 졸업 후 그는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이런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그 길은 가시밭길이다. 정권의 탄압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도 체포되어 무려 십 년 간을 교도소에 있어야 했다. 그 기간 그의 어린 아들이 병으로 죽었지만 그는 장례식 조차 가지 못하게 된다. 이런 비극은 그를 더 강인하게 만들었다.
교도소에서 그는 동료 죄수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책을 구해와서 경제학, 법학을 공부했다. 밤을 새워 공부하며 그는 교도소 안에서 석사, 박사까지 취득하게 되었다. 인종차별 이슈가 전세계적으로 몰아닥치던 시기이다 보니 짐바브웨 백인 정권도 교도소에서 그가 공부하는 것을 막기 힘들었던 것이다.
10년 간의 교도소 생활을 끝내고 그는 석방되어 아프리카 독립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짐바브웨 뿐만 아니라 인근 국가인 남아공, 모잠비크 독립까지 후원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독려하는 선구자가 된 것이다.
짐바브웨 백인 정권은 더는 국내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정권을 이양하게 된다. 1980년 그는 56세의 나이에 짐바브웨의 지도자가 되었다. 37년 간의 장기 독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라 이름을 로디지아에서 짐바브웨라는 아프리카식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백인 지주들의 농장을 모두 몰수하고, 그들을 국외로 추방해버렸다. 오랜 기간 탄압 받았던 흑인들은 환호했지만 이 정책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부를 독점하고 있었지만 선진 농법으로 많은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이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한 것이었다. 선진 농법을 모르는 흑인들에게 분배된 토지에서는 생산량이 급감했다. 농지는 황폐화되었고 식량자급률은 확 떨어지게 되었다. 자국 출신 사람들이 추방당한 것을 보고 서방 많은 국가들은 경제제재를 가했다. 국가 경제는 휘청이게 되었다.
2000년대 당시, 경제난을 이기지 못하고 짐바브웨인의 1/4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2009년의 실업률은 무려 95%였다. 빈곤율은 무려 80%에 달했다. 백인에 대한 증오심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낸 성급한 정책들은 나라 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진짜 심각한 문제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짐바브웨 달러가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서 무가베의 막가파식 정책이 절정에 달하게 된다. 경제제재와 국내 생산 부진으로 나라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고 돈이 부족해지게 되었다. 무가베는 중앙은행에 돈을 마구 찍으라고 명령했다. 엄청난 돈이 새로 유통되었고 이는 경제를 파괴시키고 말았다.
2008년 4분기에만 물가가 무려 7.3 ×10의 22승 배가 올랐다. 730해 퍼센트가 오른 것이다 (경 다음 숫자가 해이다). 당시 머리 한 번 이발소에서 깎으려면 한국 10년 국가 예산을 요금으로 내야 했다고 한다. 돈을 챙겨가도 소용이 없었다. 걸어가는 도중에 물가가 오르기 때문이었다. 짐바브웨는 100조 달러 지폐까지 찍어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사람들은 물물교환에 의지해서 살아가야만 했다. 짐바브웨의 사례는 역사 상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큰 재앙이었다.
본인이 경제 위기를 자초했음에도 무가베는 태연자약했다. 그의 사치는 끝을 몰랐다.
그의 89번째 생일잔치 때는 수백만 달러가 사용되었으며, 호화롭게 차려진 단상에 온갖 귀빈이 초청되어 최고급 와인 2,000병, 조니 워커 500병 등 진귀한 술이 제공되었다. 89세 생일을 기념하여 89킬로그램의 케이크가 준비되기도 했다. 89개의 풍선을 하늘로 날린 것은 덤이었다. 여기에 코끼리, 기린, 악어 고기까지 제공되었다. '무가베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다' 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그의 부인인 그레이스는 전용기를 타고 수시로 영국이나 프랑스로 가서 한 번에 몇 억원의 명품을 구매했다. 그녀는 특히 구찌 브랜드를 선호해서 별명이 '구찌 그레이스' 가 되었다.
짐바브웨의 모든 돈은 다 자기 것이었다. 내가 피땀흘려 세운 나라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 그게 그의 마인드였다. 그에게는 더 이상 독립운동가의 초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영원히 본인이 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본인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온갖 선거부정이 판을 쳤고, 반대파는 납치되어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는 소년병을 양성해서 이런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자주 동원하였다. 선악을 아직 분간하기 힘든 어린 아이들에게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준 것이다.
나이가 93세였던 무가베는 대통령 자리를 자기 부인인 그레이스에게 물려주기로 마음 먹고, 차기 대통령 후보였던 총리를 갑작스럽게 해임해버렸다. 총리는 군부 실세로 당연히 반발하게 되었다. 이는 쿠데타를 불러왔고 37년 간 독재했던 무가베는 하루 아침에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37년 간 짐바브웨를 자기 소유물 마냥 쥐어짰던 그의 마지막은 참 비참하고 허망하기만 했다. 2년 뒤 그는 95세로 사망했다.
무가베도 처음부터 악했던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독립을 위해 10년 간이나 교도소에 갇혀 있었고, 그 안에서 다른 죄수들을 직접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하던 열린 사고의 엘리트였다. 당시 그 지역에서 그와 같이 학식이 높고 의지가 강했던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그런 그가 왜 이렇게 악독한 독재자가 되고 말았을까? 영웅심리에 빠졌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고 키운 이 나라의 주인은 나라는 심리,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지키냐는 교만함이 그를 이렇게 바꾸고 말았다.
사람이 권력을 잡고 나면 놓기가 싫어진다. 주변에는 나를 떠받드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운전기사, 가정부, 요리사, 비서 등 내 편의를 봐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그 달콤함이 너무나 강렬한 것이다. 여기에 빠지기 시작하면 초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팀장만 되도 나에게 충성하는 팀원들이 생겨나게 된다. 임원이 되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권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군인들도 장성까지 진급했다가 전역한 사람들의 경우,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다고 한다. 내 주변에서 비위를 맞춰주고 내 수족이 되어주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다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도 계속 당선되려고 기를 쓰게 된다.
초심 유지 방법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수많은 방법들이 나온다. 이 중에는 정말 좋은 내용도 있고, 이걸 과연 지속할 수 있을까 싶은 내용들도 있다.
추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음 세 가지이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 재미가 없어지고 질리게 된다. 이 때 일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재미 요소를 결합하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 다 쓰면 수고한 나에게 커피 한 잔 사주기, 잘한 일을 하나 할 때마다 통에 클립을 하나씩 넣고 그 클립이 스무개가 되면 오후 반차 쓰고 쉬기.. 이런 재미 요소들을 넣어보자.
비슷한 업무지만 이번에는 챗 GPT도 써보고, 관련된 책도 읽어보면서 조금씩 변화를 줘보자. 영업 일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영업 보고서를 어떻게 쓰면 좋은지 챗 GPT를 활용해보는 것이다. 나와는 다른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다. '영업 사원이 된 홍대리'나 '미생'에서는 영업사원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내 방식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일하는 방식도 보는 것이다.
초심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장소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내가 한참 힘들고 어려웠을 때 있었던 장소이다. 세 평 고시원에서 살았던 사람에게는 그 방이 힘들었던 장소였을 것이다. 허름한 식당에서 매일 저녁을 먹었다면 그 장소가 될 것이다.
나는 이직하는 과정에서 두 달 정도 직장 없는 공백기가 있었다. 그 때는 한겨울이었다. 칼바람을 맞으며 한강변을 걸으며 나는 지금의 고통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지금도 일 하기 싫고 괴로울 때 나는 한강변 그 자리를 간다. 천천히 걸으면서 그 때 기억을 되살려본다. 무가베도 자기가 10년 간 갇혀 있었던 교도소를 자주 가봤다면 이렇게까지 변하게 되었을까 싶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잘 살아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정치인들이 초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리에 연연하며, 무리수를 두게 된다.
비단 정치인들 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살 빼기, 운동하기 이런 좋은 습관들은 일주일을 넘기기 힘들다. 눈 녹듯이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결심 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미 요소를 추가해서 내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져야 한다. 조금씩 방식을 바꿔가며 일해보자. 그리고 내가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가베처럼 극과 극을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