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간질에 대처하는 방법 (1편:영국의 식민정책)

역사에서 배우는 일 잘하는 방법

by 보이저

팀 구성원 중에는 교묘하게 다른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다. "얘가 너 이기적이라고 욕하더라" 이런 말로 서로를 갈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본인은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며 미소 짓는다.


리더 중에도 이런 이간질을 즐기는 사람이 은근히 있다. 팀원들이 똘똘 뭉치지 못하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불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팀에서는 좋은 팀워크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전략을 즐겨 쓰는 리더들이 많다. 왜 그럴까? 다스리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모래알 팀워크가 되는 순간 팀원들은 팀장에게만 의지하고 잘 보이려고 한다. 서로를 믿지 못하기에 각자도생하려 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이간질 정책을 즐겨쓰는 강대국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1편에서는 영국이 식민지를 다스릴 때 즐겨썼던 이 이간질 정책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보고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나라들의 모습을 알아보고자 한다.


2편에서는 여진족 대상으로 청나라와 조선이 썼던 이간질 정책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이 정책이 효과를 거두다가 실패하게 된 배경, 청나라는 어떻게 이간질을 극복했는지 쓰려고 한다.




영국은 신사적이었을까?


사람들은 영국을 '신사의 나라' 라고 한다. 중절모에 트렌치 코트를 즐겨 입고, 오후에는 홍차를 마시며 '이브닝 스탠다드' 신문을 읽는 100년 전 영국 신사의 모습을 흔히 떠오른다.


영국은 신사적으로 식민 통치를 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영국은 앞에서는 그 나라 문화를 존중하는 것처럼 신사적으로 행동했지만, 뒤에서는 이간질이라는 악랄한 방법을 즐겨 사용하고는 했다. 영국은 전 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일이 관리를 파견해서 직접 통제할 수 없었기에 이간질 정책을 대안으로 활용했다. 그 이간질 정책이 대표적으로 사용된 국가는 바로 '인도'였다.

영국 신사


영국이 인도를 이간질한 계기 (세포이 항쟁)


영국에게 인도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땅이었다. 면화는 엄청나게 재배되었고 각종 농산물을 싼 값에 재배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인도는 너무나도 큰 땅이었다. 게다가 힌두교, 이슬람교가 섞여 있고 지역마다 다양한 언어와 풍습이 있어 통치가 쉽지 않았다.


영국이 처음부터 이간질 정책을 썼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이 태도를 바꾸게 된 것은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 사건은 바로 '세포이 항쟁' 이라는 인도 군인들의 반란이었다.


영국은 인도 통치를 위해 군대가 필요했다. 영국인 부대만으로는 그 커다란 인도 통치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현지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었다. 당시에 사용하던 엔필드 소총은 화약을 이빨로 뜯어 총구에 총알과 같이 집어넣고 쏘는 방식이었다. 비가 와도 화약을 감싼 종이가 젖지 않게 하려고 기름을 발랐다. 그런데 인도군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기름은 동물기름인데 소기름, 돼지기름이 주성분이라는 것이었다.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 군인들은 이 사실에 분개했다. 돼지를 부정하게 여기는 이슬람 군인들도 분노했다. 인도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트리거(Trigger)일 뿐이었다. 평소 영국 장교들은 인도군을 열등하고 미개하다고 무시했는데,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평소의 불만이 폭발하게 된 것이었다. 반란은 불길처럼 번졌다. 병력 수도 많은데다가 영국식 군사훈련에 첨단 무기로 무장한 인도군이라 진압은 쉽지 않았다. 영국은 인도 각지에서 패하며 인도를 잃어버릴 위기에 쳐하게 되었다.


이 때 영국은 이간질 정책을 꺼내들었다. 인도군 내 민족감정을 유발시킨 것이다. 인도에는 시크교라고 하는 종교가 있다. 시크교 남성은 늘 칼을 휴대하고 다닐 정도로 호전적이다. 영국은 시크교 사람들에게 힌두교인들이 시크교에 가하는 차별을 상기시키며 분열을 유발했다. 소수 민족들에게는 보상을 약속하며 토벌군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네팔의 구르카족은 이 때 영국의 편에 서서 앞장서서 인도군을 공격했다. 시크교도들도 영국군에 가담해서 싸웠다. 어제까지 한 편이었던 인도군은 극심한 분열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세포이 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국은 이 때 확실하게 깨달았다. 분열시키는 것이 효과적인 통치 전략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포이 항쟁


영국의 식민 통치 전략


인도는 힌두교도 75퍼센트, 이슬람교 20퍼센트, 시크교 등 기타 종교 5퍼센트로 구성된 국가이다. 이 때 영국은 소수종교인 이슬람교와 시크교도에게 모든 권력을 다 몰아준다. 평소에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도들에게 차별 받으며 쌓여왔던 설움을 폭발시킬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에게 칼을 쥐어주면 알아서 칼춤을 춘다. 그렇게 쌓여 있던 응어리를 분출하는 것이다. 영국 입장에서는 아주 땡큐다. 자기들은 뒤에 숨어버리면 그만이다. 모든 책임은 이슬람교도, 시크교도에게 전가하면 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런 프로세스이다.


1) 사회 갈등 구조를 파악하기

2) 억압받는 소수에게 권력 몰아주기

3) 통치자는 뒤로 빠지기

4)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싸우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기



이렇게 인도는 서로를 증오하며 다투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단결은 이제 불가능하다. 영국은 손쉽게 인도를 요리해서 맛있게 먹기만 하면 그만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키려고 한다. 전쟁으로 나라가 파탄난 상황에서 도저히 더는 식민지를 운영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사회 갈등은 이제 극에 달해서 처음에 갈등을 유발했던 영국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때 영국은 이슬람교도들을 또다시 선동한다. 영국 입장에서는 독립한 인도가 힘을 잃어버려서 영국에 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것이 최선이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독립국가를 만들어야 너희가 힌두교도들에게 보복당하지 않는다고 선동했다.


보복이 두려웠던 이슬람 교도들은 '알리 진나' 라는 지도자가 주축이 되어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간디는 극구 반대하였으나 온갖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상대편 마을에 쳐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칼로 찌르는 일들이 발생했다. 보복은 또 보복을 부르고 있었다. 더는 유혈사태가 벌어지면 안되었기에 간디도 결국 이슬람 국가를 인정하고 만다. 그 국가는 나라 이름을 공모하였고, 한 대학생이 만든 이름을 택하였다. 그 이름은 바로 '파키스탄' 이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당시, 엄청난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다. 상대 국가에 남을 경우 보복과 차별이 뻔했기에 본인들 종교가 우세한 국가로 떠난 것이다. 그 인원은 무려 천 만 명이 넘었다. 그 과정에서 기아와 탈진, 테러로 수 많은 사람들이 이동 도중에 죽고 말았다.

민족의 대이동


인도가 치르고 있는 후유증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인도 북서부에는 카슈미르라고 하는 산악지대가 있다. 파키스탄 독립 당시 이 지역 지도자는 힌두교도였으나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이슬람교였다. 카슈미르 지도자는 인도에 편입되려고 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파키스탄으로의 복속을 주장하였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군대를 이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 지역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며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지금도 두 나라는 서로 싸우고 있다. 핵무기까지 만들며 언제든 상대국가를 공격하려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다.


이 사태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일까? 분열의 씨앗을 뿌린 영국이 아닐까? 그러나 영국은 뒷짐만 질 뿐이다. 사회 갈등의 후유증은 해소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다. 지금도 인도에서 이슬람교도는 카스트 제도 바깥에 위치한 최하층민으로서 교육이나 취업의 기회에서도 배제되어 있다. 한 번 생긴 분열은 이만큼 극복이 어려운 것이다.



2편에서는 청나라가 명나라와 조선의 이간 정책에 맞서 끝내 대제국을 건설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인도와 달리, 청나라는 이간 정책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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