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일 잘하는 방법
한명회는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많은 신하들은 세조에게 등을 돌리고 관직을 거부한 채 낙향해버렸다. 이 상황에서 세조는 전적으로 한명회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한명회의 존재감은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그러나 영원히 올라가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한명회에게도 조금씩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의 전매특허였던 빠른 눈치가 가져온 부작용 때문이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그가 죽인 사람은 작게는 말단 군인부터 높게는 왕(단종)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당연히 한명회 이름만 나와도 이를 가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한명회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사관들조차 그의 악행을 기록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워낙에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알아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세조였지만, 그 뒤에서 조종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한명회였다. 이쯤되면 누가 왕이고 누가 신하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조가 죽고나자 그의 아성은 금기 가기 시작했다.
성종이 즉위하자 한명회는 약삭빠르게 자기 딸을 왕비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딸은 일찍 죽고 말았다. 성종은 한명회가 싫었다.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안하무인인 그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왕이라도 한명회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워낙에 눈치가 빠른 자라 어설프게 공격했다가는 왕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종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대비마마였던 정희왕후가 성종이 성인이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었는데 한명회는 수렴청정을 계속해달라고 대비에게 간청하였다. 이는 왕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이쯤되면 알아서 조심해야 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찾아오자 그는 자기 별장인 압구정에서 (강남에 있는 그 압구정 맞다. 한명회 별장에서 유래한 동네 이름이다) 사신 접대를 하겠다고 말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이 있는 궁궐도 아니고 신하의 별장에서 사신을 맞이하겠다니..조선의 실권자는 한명회 바로 자신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행동이다. 성종은 분노했다. 다른 신하 같았으면 이건 최소 유배형이다. 그러나 성종은 역시나 한명회를 건들지는 못했다. 한명회는 여기서 한술 더 떴다. 사신에게 씌워야 하니 왕이 쓰는 우산인 일산(화투에서 비광에 그려진 그 우산 이다)을 빌려 달라고까지 했다. 개념을 상실한 행동이었다.
왕이 화를 내며 거절하자 한명회는 삐졌다. 궁궐에서 계획된 사신 접대행사에 부인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은 것이다. 누가봐도 삐져서 하는 행동인게 확 티가 났다.
대신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벌을 주라고 성종에게 간청하였다. 할 수 없이 그는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였다. 한명회나 되었으니 이 정도 선에서 끝난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그 뒤에 찾아오고 있었다.
한명회는 72세까지 살았다. 환갑만 넘겨도 오래 살았다는 소리를 듣던 당시에 장수하였다.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진짜인가보다.
그의 불행은 연산군 때 시작된다. 성종 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가 궁궐에서 쫓겨나는 것에 찬성한 적이 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제대로 찍힌 그가 거기서 입 잘못 놀렸다가는 나락으로 갈 판이었다.
그러나 연산군 입장에서는 적극적으로 어머니를 옹호하지 않고 침묵한 것은 찬성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권세가의 한 마디로 판세가 바뀔 수 있는데 그 역할을 안 한 것이다. 이미 그는 죽고 없었지만 연산군은 사형에 준하는 판결을 내린다.
묘지를 파내서 그 속에 있는 관을 부수고, 백골이 된 시체의 목을 자르는 극형이다. 물론 이미 죽은 사람이 "나 아파요!" 소리를 지를 일은 없고 요즘의 상식으로는 아무 쓸데 없는 무의미한 쇼이지만, 유교 이념이 사회를 지배하던 당시에는 아니었다. 부모가 죽으면 묘지 곁에서 삼년 간 움막을 짓고 삼년상을 지내던 판에 부모 시체가 그렇게 난도질 당하는 것은 큰 재앙이었다.
한명회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블로그는 역사를 소개하기 위해 운영하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옛 사람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회사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은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명회는 눈치의 달인이었다. 그의 출세의 99퍼센트는 빠른 눈치 덕분이었다. 젊었을 때 그 촉이 살아있었을 때는 그 눈치가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렇게 약삭빠르게 처신하는 것이 당시에는 좋았지만, 그 행동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는 사실 말이다. 한명회는 수많은 적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를 전적으로 감싸고 도는 세조가 무서워서 차마 말을 못하고 숨 죽이고 있었던 것 뿐이다.
내 버팀목이 되던 세조가 죽자,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의 왕들은 그를 경계했다.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그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때 그는 제대로 처신했어야 한다. 알아서 모든 권력을 내려놨으면 되었다. 그러나 권력의 단맛을 알아버린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게 한명회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머리 좋은 학생들이 자기 머리만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듯이, 눈치 빠른 사람들은 자기 눈치만 믿고 자기 판단에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 습득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것도 문제이다. 눈치로 다 파악하면 되는데 지식은 어디에 쓰는 물건이고 정보는 또 무어람 싶은 것이다.
그러나 눈치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특히나 현대 사회는 하루만 지나도 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세상이다. 눈치만 갖고 모든 것을 다 커버할 수 없는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원칙보다는 인맥 등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명회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기회주의적으로 보이기 쉽다. 그래서 적을 만들기 좋은 것이다. 아첨하기 좋아하고 늘 주류에만 붙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이런 이미지가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독이 될 수 밖에 없다.
눈치하면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바로 한명회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사극에서 단골로 많이 등장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약삭빠르고 눈치가 빨라 성공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처음은 미약했으나 중간은 창대했다. 그러나 끝은 다시 미약했다' 이다. 만일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연산군에 의해 진짜 험한 꼴 당할 뻔했을 것이다.
눈치가 빠른건 분명히 큰 미덕이고 장점이다. 그러나 눈치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듯이, 항상 내가 눈치로 판단한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다시 확인하자. 그리고 내가 이렇게 처신하는것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지, 지금 내가 적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하자.
한명회의 삶은 오늘날의 직장인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