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개의 로마(8)

-보편제국 이념을 중심으로-

by 글쓰는 인문학도

2.6. 동로마 제국: '중세 보편 제국'으로서의 '로마 제국'


그렇다면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전근대 민족 국가'가 아닌, '로마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중세 보편 제국'**으로 보고자 합니다. 즉,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의 연속선상에 있는 국가이며, 비록 영토가 축소되고 그리스어 중심으로 변화했을지라도 여전히 '보편 제국'의 이상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은 고대 로마 제국의 종말이 아니라, 제국의 중심축이 동쪽으로 이동한 사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제국의 서쪽은 '중세 봉건 사회'로 이행되었지만, 동쪽에는 여전히 '로마 제국'이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존속했습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멸망은 476년이 아니라 145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2.7. 동로마 제국에 대한 외부의 시선: 오도아케르와 게르만족, 그리고 '보편 제국' 이념


동로마 제국 사람들의 자기 인식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의 시선 역시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줍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입니다.

오도아케르는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 대장으로, 서로마 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후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고 동로마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오도아케르는 편지에서 **"이탈리아에는 더 이상 황제가 필요 없고, 콘스탄티노플에 계신 황제 한 분만으로도 동서 양쪽 제국을 모두 통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오도아케르 역시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동로마 황제를 '로마 황제'로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오도아케르뿐만 아니라, 당시 게르만족 지도자들 대부분은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동로마 황제를 자신들의 상급 군주로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동로마 황제로부터 관직과 칭호를 받으며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고, 로마의 문화를 흠모하며 로마 제국의 질서에 편입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크 왕국의 창건자 클로비스는 동로마 황제로부터 '콘술(집정관)'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동고트 왕국테오도리쿠스는 동로마 황제로부터 '부왕(副王)'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사람들이 로마 제국을 '멸망할 수 없는 영원한 보편 제국'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더라도 로마 제국은 여전히 동쪽에 존재하며, 동로마 황제야말로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2.8. '로마적 정체성'의 균열: 서유럽의 도전과 동로마 제국의 변화


그러나 이러한 '로마적 정체성'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독점적 지위는 8세기 이후 점차 도전을 받게 됩니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고, 800년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로 대관되면서 동로마 제국의 '로마적 정체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로마'라는 유산을 둘러싼 동서 유럽 간의 경쟁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니케아 제국(1204-1261) 시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로마적 정체성'보다는 '그리스'적 정체성이 강조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라틴 제국(1204-1261)이 세워지는 등, 동로마 제국의 '보편 제국'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실추된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곧 '로마적 정체성'의 완전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니케아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을 재건한 후에도 여전히 '로마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며 '로마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