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을 담고 흐르는 강
마흔셋. 사월이 시작된 지 열흘을 막 지나고 있을 때, 나의 몸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견딜 수 없는 요통은 나를 척추염으로 묶어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과로와 면역력 저하로 척추 두 마디에 생긴 염증은 내게서 자유를 앗아갔다. 침상이 식탁이 되었고 화장실이 되었다. 다섯 달 동안 의사가 허락한 내 활동 반경은 침대뿐이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누워서 해결했다. ‘절대안정’의 제약된 생활로도 염증을 억누르지 못했고 농양까지 생겨 하반신 마비를 초래했다. 응급으로 대구와 서울에서 두 번의 수술이 있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치료는 서울까지 이어졌다. 삼 개월 한시적이고 자격 없는 서울시민이 되어 보았고 다시금 칠곡의 재활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수술 후 혹독한 재활에 이 년의 시간을 지불했다. 인지 장애가 있는 할머니와 병실 생활을 하며 수면은 방해를 받았고, 젊은 여자환자의 발병이 궁금한 시선 속에서 힘들고 지난(至難)한 재활 치료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 시간 들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육 남매의 지원과 친구의 응원이 있었다.
삼십 년 지기 친구는 나의 감정의 주기를 용하게 알아차리고 방문했다. 마흔셋에 다시 배운 걸음마는 더디게 나를 일상으로 데려다주었다. 가을의 단풍이 고운 색을 뽑아내는 날, 친구와 친정 오빠가 왔다. 아직도 서툰 걸음과 비틀거리는 몸짓을 양쪽에서 부축했다. 나의 취향을 고려해 친구는 안동을 권했다. 산모퉁이를 돌아 올라갔다. 병원 냄새에 찌들어 있던 내 몸에 생기를 줄 곳은 보약 같은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였다. 코를 타고 들어오는 알싸한 공기는 허파꽈리를 팽창시키고 맑은 공기는 둔해져 있던 뇌세포를 자극시켰다. 창백하던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젊어지는 기분이다.
재활 치료에 힘겨워하는 내게 만대루는 숨을 틔게 해 주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壯觀)이 거기에 있었다. 만대루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니 흡사 조선 시대 양반이 된 듯했다.
낙동강의 물돌이가 S자를 그리며 흐르는 중심에 병산서원이 있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만대루와 깎아지른 병풍 절벽 병산(屛山)은 서로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만대루 같은 넓은 품을 가진 친구와 가시 돋치게 살아온 나의 모난 삶, 그 사이에는 지나온 삶을 투영시키는 우정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만대루에는 그의 나이만큼 많은 사람들의 걸음이 담겨 있다. 성리학을 향한 유생들의 열기와 사대부의 풍류가 아른거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삶이 일곱 칸 누마루에 어려있는 듯하다.
절집 풍경이 좋으면 고승이 안 나듯 병산서원의 경치가 아름다워 유생들의 공부는 안됐을 것 같다. 대신 병산을 바라보며 인품은 어질고 강물을 바라보며 지혜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곳에 올라 수많은 이들이 바라봤을 장관은 병산을 담고 쉬지 않고 흐르는 낙동강의 여유로운 물결이다.
낙동강물은 봄의 생동감에 리듬을 얹어주고, 여름날 더위에 지친 나무초리까지 물줄기를 보태준다. 가을단풍의 색을 오롯이 담고 흐르며 만물이 동면을 준비할 때도 그의 박동은 멈추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는 낮은 곳으로 나아갔다.
빨래 방망이 소리에 얹힌 새댁의 하소연을 받아주었고 억울하던 시절 사내의 가슴에 흐르던 절규를 담아 주었다. 청춘의 애타는 심정을 들어주고 삶을 놓으려는 이들에게 살아내야 하는 이유를 비춰주었다. 상처받은 맘을 가진 이에게는 씻겨짐을, 쉼이 필요한 이에게는 안식을 줬을 듯하다. 물은 그들을 덮어줬고 용서하게 했고, 내게는 회복의 에너지를 주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재활, 치료의 효과는 보이지도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회복의 속도는 거북이걸음보다 훨씬 느렸다. 길고 지루한 시간은 계속되었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나약한 맘이 나를 꼬드기면 병산을 담고 남으로 남으로 멈추지 않고 흐르던 그 강을 생각했다. 조급함을 내려놓게 하고, 지루함에 생동감을 돋우어 주었다. 나를 먹여주고 씻겨 주고 부축하여 처지는 기분을 환기해 주던 친구의 맘이 강물에 진하게 어려있다.
우정이 흐르고 있다. 진하고 푸르다. 남으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지금은 지천명(知天命) 지역을 하회(河回)하여 흐른다.
2014.11.19. 수요일
도산서원 오르는 길에서 오빠.
도산 서원에서 병산 서원까지 데려다 준 친정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