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부채'
고등학교를 들어간 그 해.
할매가 있는 큰집에 가면 좋은 게 있었다. 비디오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큰집 형들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숨소리도 들키지 않게 봤었다. 그때 본 홍콩영화에 푹 빠져 버린 나는 틈만 나면 큰집에 몰래 가서 훔쳐봤었다. 할매 혼자만 작은 방에 있을 때 큰방 문을 잠그고 보기도 했었다.
"뭐 하노"
할매가 부르는 소리에 문고리를 잡고 귀를 갖다 댔다.
"아무것도 안 한다. 그냥 공부 좀 하다가 갈끼다."라고 큰소리쳤다. 잠깐 굳은 채로 문 앞에 있다가 다시 장롱에 기대어 다시 비디오를 봤다.
할매는 전설에 고향에 나오는 할매랑 똑같았다. 하얀 머리에 비녀를 꽂아 머리를 고정했고 항상 한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지팡이를 생일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 알아본 적이 있었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아 꽃향기 나는 부채를 대신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부채는 작은 방 할매만의 거울 상자 속에서 나오진 않았다. 할매는 항상 머리 감고 그 거울 상자를 열어 거울을 펼치고 참빗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며 사극에 나오는 쪽진 머리를 했었다. 그래서 할매였다.
그날도 비디오가 보고 싶어 큰집으로 올라갔다.
'아이고~ 아이고'라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작은 엄마가 할매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할매가 천장을 보고 누워있고 팔과 다리가 꺾인 채로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뒤집힌 벌레처럼 이상했다.
'어디 아픈 건가? 119를 불러야 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른들이 있으니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꽉 쥔 주먹에 있던 것을 빼내려고 작은 엄마는 팔과 다리를 계속 쓸어내리고 손가락에 힘을 주고 펴려고 했다. 주먹 쥔 손에 그것은 부채였다.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면 나눠주는 접히지도 않는 부채. 항상 우리 집에 오실 때 지팡이와 함께 손에 있던 그 부채였다. 꽉 쥔 주먹에서 부채가 보였을 때 뒤돌아 나와 버렸다. 커지는 아이고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았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계속 걸었다. 뒤집힌 벌레 같은 할매가 자꾸 떠오르고 눈물이 났다.
집에 가야 하는지. 큰집에 다시 가야 하는지. 아버지는 알고 있는지. 엄마는 모르는지. 작은 엄마는 어떻게 엄마보다 먼저 와 있은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국민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날도 생각났다. 어른들은 왔다 갔다 하며 울고 화내고 싸우고 빠르게 움직였다. 한 살 많은 누나와 사촌동생 두 명은 큰집에 갔다가 집에 가 있으라는 말을 듣고 배고프지만 아무 말 않고 집으로 갔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누나에게 빨리 가서 티브이에서 하는 만화 볼 시간이라고 빨리 가자고 했었다. 4살 많은 형은 집에 오자마자 티브이를 켠 나의 머리를 때렸다. 그래서 울었다. 때린 형도 울었다. 옆에 있던 누나도 울었다. 왜 우는지 몰랐다.
동네를 벗어나지는 않았고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에 생각이 덮어지는 것 같아 도로가를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큰집과 우리 집 그리고 작은집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할매가 항상 걷는 길이었다. 집으로 갔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잠들었다. 엄마가 나를 깨우고 "할머니 돌아가셨다."라고 했다. 오른쪽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갑자기 눈에 힘이 들어가 눈을 감았다. 입이 벌어지지 않게 힘을 줬지만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소리는 내 입을 통해 나오고 말았다. 코를 계속 들이마시며 숨을 멈췄지만 눈물이 흐르고 콧물이 나오고 흐느끼는 소리가 나왔다.
"엄마는 먼저 갈 테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가지 말고 큰집으로 와."
자고 일어나서 아침인 줄 알았는데 밤이었다. 시간은 느리게 걸었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올 때처럼 느리기만 했다.
만화보다 더 재밌는 걸 알게 된 국민학교 4학년때였다.
토요일은 '유머일번지'를 보고 일요일은 '일요일밤이 대행진'을 보는 게 너무 좋았던 그때쯤부터는 할매와 자주 걸었다. 할매보다 내가 좀 더 앞에 걸었다.
"할매, 좀 빨리 가자. 일요일밤에 대행진 끝나겠다."
저녁을 드시고 큰집으로 돌아가시는 할매를 모셔다 드리는 일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부터 내 할 일이었다. 아빠는 할매를 혼자 밤에 다니시게 하지 않았다. 항상 형이나 누나가 갔었는데 이제는 내가 하게 되었다. 몇 걸음도 걷지 않고 자꾸 멈춰 선다. 허리를 펴고 부채질을 하는 할매를 보챈다. 빨리 돌아가서 코미디프로를 봐야 하는데 느리게 걷는 할매가 못마땅했다.
"할매, 천천히 올라 온네이."
큰집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먼저 올라가서는 큰아버지, 큰엄마에게 인사하고 "밥 먹었어?"라는 물음에 "네."하고 "안녕히 계세요."라고 뛰어간다. 좁은 계단으로 올라오는 할매를 비켜서 내려가면서 "할매, 안녕히 주무세요. 먼저 간데이."하고 집으로 뛰어갔다.
아직 깜깜한 창밖을 보고 다시 누웠다.
'부채는 왜 쥐고 있었을까? 우리 집에 오려고 나오시려 했었던 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국민학교 입학식 때였다. 엄마는 텔레비전에서 앉아서 말만 하는 아줌마처럼 예뻤다. 친척 결혼식에 갈 때처럼 예쁜 옷을 입었다.
"학교는 꼭 가야 한다. 알제?"
"알았다."
국민학교 2학년 햇볕이 아침부터 뜨거운 날 아침. 오후반이었던 나는 늦게 일어났다. 아빠와 엄마는 일하러 가셨고 형과 누나는 학교에 가고 없었다. 밥상에 남겨진 계란프라이와 김치찌개를 먹고 책가방을 챙겼다. 준비물을 사야 하는데 엄마가 밥상에 돈을 놓고 가지 않았다. 준비물이 없으면 교실에 못 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학교를 가지 않았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왜 화나는지도 모르고 계속 울었다. 밖에서 누가 들을까 봐 이불로 소리를 덮었다. 울다 지친 나는 잠들었고 한참 후에 깼었다. 땀으로 온몸이 젖어 시원한 마루로 자리를 옮겼다. 선풍기를 틀고 회전을 시킨 다음 마루에 있는 문을 살짝 열어 두고 다시 잠들었다.
살랑살랑 얼굴이 간지러워 눈을 떴다.
"할매~애"
가느다란 할매의 부채가 하늘에서 있었다가 없었다가 한다.
"일났나? 학교 안 가도 되나?"
"못 간다. 돈 없어서 못 간다."
목구멍에서 커다란 게 나오려고 해서 목에 힘을 줬다. 입을 다물고 몸을 웅크리고 할매 무릎에 머리를 올렸다.
할매의 부채는 더 크게 보였고 더 빠르게 있었다가 없었다가 했다.
바람이 나에게 왔다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