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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빵은 어디로

아직도 배운다- 글쓰기 동아리 '간식'

by Goldlee

토요일 오전. 12주 동안 현대미술사 수업을 들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들었을 법한 인상주의부터 팝아트까지 모네, 고흐, 피카소, 칸딘스키, 앤디 워홀의 이름이 들려오니 그때는 왜 배워야 하는지를 몰라서 재미가 없었는데 지금은 알고 싶어서 스스로 찾아서 온 것이니 듣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내 기억에 남는 한 가지는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교양을 실천하는 인간의 모습을 확인하는 수업이기도 했다.

마흔 명의 정원에 오십 여분의 사람이 첫 수업에 참석했다. 직접 세어 본건 아니고 담당자의 말을 듣고 알았다. 강사님의 첫 수업을 듣고 그 이유를 알았다. 대학교수님의 사회봉사차원의 수업이며 그 실력이 출중하다는 소문이 발 빠르게 이어졌던 것이다. 지역 주민중에 특히 중년의 여성분들에게 인기가 있고 그 소문이 제대로 퍼졌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임을 알 수 있었다. 운 좋게 참석하게 된 나는 꽉 찬 강의실의 분위기를 보고 신기하기만 했다. 수업이 시작되고 강사님의 화법과 지식에 감탄하며 다시 한번 이 수업이 왜 인기가 좋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 교양스런 중년의 강사님이 바로 수강생의 대부분인 중년 여성들의 롤모델이 아닐까 싶다.


입구를 지나면 새내기 대학생인 아르바이트생이 출석을 체크한다. 이름을 말하면 동그라미를 치고 1인당 하나씩이라는 빵과 음료수를 나눠준다. 그리고 휴식시간에 과자류의 간식을 책상에 올려두면 끝인 아주 쉬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수업을 듣고 나서 착각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극한알바'였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극사실주의 인간의 내면성을 '사진보다 더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1인당 한 개의 빵과 음료수를 제공됩니다."

관리자의 말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 나는 공짜간식에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싶었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40명분의 간식보다 더 많은 간식을 준비했지만 늦게 온 사람은 못 먹은 사람이 많았다. 그 불만은 다음 주에 관리자의 마이크로 이어졌다.

"빵과 음료수는 1인당 하나씩입니다. 출석 이후 남는 빵은 남는 게 아니라 늦게 오시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관리자의 마이크가 커진 것 같다. 야수들에게 교양을 가르치는 사육사 같았다. 야수파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내 빵을 받았다. 다른 빵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흐나 고갱처럼 같은 시대 속에서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후기인상주의 같았다고 할까. 이 야수들 속에서 나는 아니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내기인 대학 아르바이트생이 안 나온 날. 관리자분이 직접 출석체크를 했다. 정확히 나온 사람만큼 줄어든 빵과 음료수. 엄마보다 더 많은 나이를 가진 야수들에게 시달렸을 아르바이트생이 포기한 걸까? 다음 주에 멀뚱멀뚱한 눈으로 유튜브를 시청하며 출석체크 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괜한 염려였음을 알았다. 1인당 하나라는 빵을 지켜야 할 생각은 못 받은 사람들의 불만을 받아내야 하는 관리자의 몫일뿐이고 아르바이트생은 그저 3시간을 채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빵이 없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실망하며 사탕 몇 개를 더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빵하나 받을 줄 알고 아침 안 먹고 나왔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화장실에서 본 거울 속 내 얼굴이 뭉크의 '절규'처럼 보였다. 빵 하나에 변한 내적 감정과 고독이 느껴지는 표현주의를 상상하게 했다.

'아! 누굴까? 누가 더 내 빵을 가져간 걸까?'

뺏긴 것 같은 기분 때문인지 짜증이 났다. 배고픔의 짜증이었으리라. 찡그린 인상을 하고 있어서 인상파일 것 같은데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의 빠르게 변하는 근대 풍경을 전통 아카데미 미술에 대한 보수적 틀을 거부하는 인상주의처럼 내 빵을 먹은 저들을 거부하고 싶어졌다.


"출석체크 하실 때, 빵 가져가셨잖아요."

아르바이트생이 어느 수강생분에게 말한다.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는 듯 새내기 대학생의 말을 무시하며 빵과 음료수를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가는 그 황당함에 내 시선은 화살이 되었다. 휴식시간이면 아르바이트생에게 누군가 말을 걸기라도 하면 뒤에 있던 손들은 순식간에 빵과 음료수를 낚아채 간다. 대범하고도 조직적인 움직임이 소매치기 범들의 몰래카메라를 본 것 같은 영상이 내 눈에 담겼다. '아! 내 빵도 저렇게 사라졌구나.' 보고 있어도 누가 가져간 지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유튜브를 보며 시간만 채우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뒤에 있는 손을 볼 겨를은 더욱 없으리라. 야수파의 습격으로 인한 상징주의의 현실 너머의 세계가 파괴되는 듯했다.

"저기 가봤잖아."

앞에서 수다 떨며 수업시간에 나온 미술관을 가봤다고 자랑하기 바쁜 그 수강생을 기억하게 된 건. 휴대폰의 벨소리의 울림과 불법 주차 중인 차를 빼 달라는 방송을 듣고 가방을 들고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나가며 빵을 하나 챙겨가는 모습을 우아한 여배우가 레드카펫을 걸어가듯 나가는 모습을 보고 기억하게 되었다.

'내 빵도 가져간 야수구나.'

팝 아트의 대표작가 앤디 워홀의 빈 박스가 생각났다. 의미는 다르지만 저 빈 우아함 속에 비어 있는 속을 보여주는구나 싶었다. 리히텐슈타인의 눈물처럼 내 빵은 그렇게 슬픔이 된 것이다. 보고 있지만 실체가 없는 빈 박스와 과장되고 극적으로 표현된 슬픔이 유머로 다가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팝아트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보고 있는 곳이 봐야 할 곳인가? 가장 뒷자리에 앉아 내 빵을 찾기 위한 잠복수사는 막을 내렸다. 내 눈이 봐야 할 곳은 어디였던 말인가?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내 눈은 앞을 보지 않았다. 나를 보는 눈은 없지만 나를 보는 뒤통수는 너무 많았다. 그저 빵 하나 때문에 뒷자리에 앉아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인간이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되는 순수가 사라져 장르의 혼합과 아이러니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연상된다. 현대 미술사 수업시간에 나는 미술의 역사보다 인간의 이중성을 더 배우게 된 것 같다. 왜 인문학에 미술이 포함된 건지 체험한 12주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뒷자리에서 본 수업시간의 뒤통수를 그려보게 된 것이다. 내가 봐야 할 곳을 그곳이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뒷자리에서 본 뒷통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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