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친구 노릇을 그만두기로 했다

육아 은퇴를 꿈꾸며

by 온행


자식을 낳고 키우는 것은 자신의 유아기, 혹은 원가정에 대한 한풀이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시대에 자란 세대는 ‘내 자식만은 풍족하게’가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되고, 거기에서 파생된 ‘교육열’이 이 나라의 국민성이 되었다. 경제적 풍요는 어느 정도 채워졌으나 집안의 딱딱한 상하 관계가 건재했던 (나를 포함한) 그다음 세대에게는 ‘친구 같은 부모’가 되는 것이 중요 과제인 듯 보인다.


그래서 내 또래 부모들 중 상당수는 친구들과 할 법한 일을 자녀와 함께 한다. ‘나에게’ 재미있는 숏폼 함께 보기, ‘내가 좋아하는’ 캠핑 함께 가기, ‘내가 좋아하는’ 게임 함께 하기, ‘내가 매일 하는’ 메이크업이나 외모 꾸미기 함께 하기 등.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 친구와 함께 하고 싶다’는 심플한 의식의 흐름인 것 같다.




고리타분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부모의 역할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인간으로 키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저에 깔린 원칙은, ‘꼭 필요한 것만 (열과 성을 다해) 권하기, 그렇지 않은 것은 훗날 아이의 선택으로 남겨두기’이다.


하지만 모순적인 것은 나 또한 ‘친구 같은 부모’의 이미지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이의 탄생과 동시에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을 붙어 있었다. 성격이나 취향을 차치하고, 자주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인데, 아이는 3~4년은 엄마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게다가 애초에 내 몸에서 나온 나의 일부라는 생리적인 유대감이 있다.


가족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따지기에는, 나에게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다르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나의 현재 ‘상태’처럼 느껴진다. 말 그대로 인적사항이고, 나를 설명하는 형용사의 일종인 느낌이다. ‘엄마, 아빠 밑에서 첫째 딸로 태어난 나’를 설명하는 형용사. 반면에 ‘친구’라는 단어는 내가 맞은 ‘관계’처럼 느껴진다. 객체이자 명사로서의 대상이 있고,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 맺어진 관계이니 동적인 행동의 결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함께 울고 웃고 한 경험 속에서 아이는 내가 만든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끈끈한 유대감과 상호 애정 덕분인지 무엇이든 함께 하면 즐겁다. 예를 들어, 초록불이 깜빡이는 횡단보도 앞에서 아이 손을 잡고 ‘꺄아’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는 것만으로도 바보같이 크게 웃게 된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엄마, 쉬 마려워.’ 소리에 오두방정을 떨며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도 퍽이나 즐거운 추억이다. 비바람이 쏟아지는 날 함께 쓰고 걷던 우산이 뒤집어져 아이가 뿌엥 울어도 그 모습이 귀여워 내 얼굴에는 미소가 만발이다.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큰 의지가 되기도 한다. 혼자서는 일어나 앉지도 못했던 작은 생명체가, 내 표정이 조금이라도 쳐지면 얼굴 앞에서 알짱거리며 재롱을 부리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면 아이가 떠다 주는 물 한 컵에, 양보해 주는 과일 한 조각에 힘이 난다. 아이가 내어주는 작은 등에 기대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글에 공감할 것이다.




‘친구 같은 부모’가 되는 환상에서 벗어나, 어린 시절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친구와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친구와 투닥거리고 싸우면 화가 나면서도 영영 멀어질까 봐 불안해진다. 친구가 싫어할까 봐 불편한 부분을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기도 한다. 나 말고 다른 친구와 가까워지는 게 서운하기도 하다. 내가 마구 화내고 따지면 친구가 뒤돌아 떠나버릴까 봐 친구의 패악을 받아주기도 한다. 부모가 아이를 친구로 여긴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닐까. 부모는 아이를 너무나 좋아하니 말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이에게 있어 부모란 태어난 순간부터 가지게 되는 인적사항이다. 다시 말해, 아이는 부모를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 가깝고 편한 사랑하는 존재일 수는 있으나 죽었다 깨나도 친구는 못된다. 아이는 이미 부모를 떼어놓을 수 없는 가족이자 자신을 설명하는 상태로 느끼고 있다. 그런데 부모는 여차하면 끊어질 수 있는 친구 관계로 자신의 위치를 격하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부모가 아이를 자신의 베스트프렌드로 여기면 자연히 을의 입장이 되어 버리는 이유다.




그래서 나는 자주 마음을 다잡는다. ‘아이는 내 친구가 아니고, 나도 아이의 친구가 아니다.’ 아이는 자라는 동안 많은 친구를 만나고,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끈끈해질 것이다. 나는 나대로 함께 놀아줄 친구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아이는 온전한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부모에게도 온전한 육아 은퇴가 찾아올 것이다. 심리상담 전문가 이호선 박사는 육아의 최종목표를 독립적인 사회인으로 키워내는 것이라 했다. 나도 무한 공감하는 바다. 친구 역할을 과감히 놓아야 부모 역할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거창한 육아 담론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모 역할에 집중해야 아이를 내 친구가 아닌 독립적인 사회인으로 키워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적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육아 인생을 제대로 끝마칠 수 있으니 말이다.


직장에서의 수십 년만큼이나 가정에서의 수십 년 부모 노릇도 고된 여정이다. 은퇴 준비자 입장에서 직장을 잘 정리하는 것만큼이나 부모 역할을 잘 정리하는 것이 무겁고 막중한 과제이다. 그리고 그 과제의 첫 장은 아이의 친구 노릇을 그만두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스스로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는데 필요한 습관을 길러주는 부모 노릇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은퇴할 때쯤이면 아이는 친구들 틈에서 부대끼며 어른 되는 연습을 하고 있을 테고, 나는 남아도는 시간과 에너지로 은퇴 생활을 누릴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어깨가 펴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일이다.

이전 10화짧게, 자주 반짝이며 배우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