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아무도 모르게 무너지는 날
살다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너지는 날이 있다.
겉으론 평온해 보인다.
출근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웃으며 인사도 한다.
하지만 속에서는 이미 부서지고 있다는 걸 나만 안다.
아무도 모르게 소리도 없이 조금씩, 천천히 무너지는 날.
“요즘 잘 지내?” 누군가 물어올 때, 나는 습관처럼 대답한다.
“응, 잘 지내.”
그 짧은 대답 하나에 설명하지 못한 수많은 마음이 담겨 있다.
말로 꺼낼 수 없는 감정들.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받을 자신이 없는 것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다.
무너지는 건 늘 그렇게 조용히 찾아온다.
무너짐은 대개 누적의 결과다.
크게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그냥 오래 쌓인 피로, 말하지 못한 감정, 지나친 이해,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내 안의 무게를 초과해 버린다.
그리고 어느 날, 별 것 아닌 일 하나에 갑자기 무너진다.
커피를 쏟았다는 이유로, 문자 하나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약속이 갑자기 취소됐다는 이유로.
사실 그건 ‘이유’가 아니라 단지 ‘방아쇠’였을 뿐이다.
무너지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더 밝은 표정을 짓는다.
더 많이 웃고, 더 분주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조용히, 깊게 균열이 번지고 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없다.
아니, 내가 보여주지 않으니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더 외롭다.
무너지는 순간보다 더 아픈 건 무너지는 걸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나조차 애써 모른 척하는 그 시간이다.
“이 정도는 다들 겪는 거야.”
“나약해지지 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스스로에게 쏘아붙이던 말들이 결국 나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무너졌을 때 가장 필요한 건 누군가의 조언이나 해결책이 아니라
“괜찮아, 무너질 수도 있지.” 그 말 한 마디였다.
이제는 안다.
무너지는 나를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대신 내가 알아주어야 한다.
내가 지금 얼마나 버텼는지를, 얼마나 참아왔는지를.
그래서 무너진 채로 앉아 있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가끔은 그 무너짐이 나를 다시 세우는 시작이 되기도 하니까.
모든 무너짐은 나를 다시 정비하는 조용한 공사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내 안의 붕괴를 인정한다.
말하지 않았던 감정들을 이름 붙여 불러주고,
견뎌낸 나를 조용히 안아준다.
누구보다 내가 나에게 따뜻해야 할 시간.
무너진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괜찮아. 오늘은 그냥 이렇게 무너진 채 있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