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와 오빠의 이야기

by 티나

1. 외할머니의 이야기


맞벌이에 바쁜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나와 오빠를 양육해 주신 분은 외할머니셨다. 외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서울 부잣집으로 시집을 왔지만, 결혼해 보니 남편은 마음이 크게 아픈 사람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는 속아서 시집왔다.” 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지금 세상에서 이게 무슨 말이 되냐 싶지만, 그 당시에는 얼굴도 한 번 보지 않은 가족끼리 혼담이 오고 가며 결혼하는 날이 되어서야 신랑, 신부가 처음 만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항상 엄마가 최고였던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돈을 가져다주는 가장인 엄마를 최고로 여겼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나의 식사나 가사 등을 책임지셨지만, 안타깝게도 단 한 번도 애정을 받아본 느낌은 없다.


할머니는 나의 학교 생활은 어떤지, 요즘 고민은 없는지 물어보신 적이 없다. 외할머니는 아침상 차리기, 청소, 빨래, 그리고 저녁상 차리기 임무를 끝내시고 얼른 외할머니 댁으로 돌아가시고 싶어 하셨다. 늘 나에게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언제 퇴근하는지 물어보라고 시키시며, 본인의 퇴근을 재촉했다. 그리고 힘들게 일하고 온 엄마가 쉴 수 있도록 나에게 엄마를 괴롭히지 말라고 늘 당부하셨다. 오랫동안 나는 외할머니가 딸인 엄마를 사랑하고 아끼셔서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외할머니는 엄마가 돈을 가져다주는, 물주로 여겼으며, 외할머니에게 가장 소중한 자식은 큰 아들인 나의 큰 외삼촌이라고 했다. 마음 아프게도, 우리 엄마 역시 본인의 엄마에게 따뜻한 모정을 느낀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어릴 적에 비 오는 날이면, 교문 앞에 친구 엄마들이 우산을 들고 서 계셨다. 어떤 친구들은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하교하였다. 맞벌이 가정이 드물었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혼자 집으로 하교하는 학생은 드물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드문 학생 중 한 명. 재수가 좋으면 친구 어머니가 우산을 빌려주시거나, 차를 태워주셔서 집에 온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 오는 날은 신발주머니를 머리 위에 대충 가리고 집까지 뛰어갔다. 그러고 집에 오면 “다녀왔습니다.” 하는 나의 말을 듣고 “어, 왔니? 비가 왔나 보네?”라고 말씀하셨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외할머니의 말에 내가 비를 맞아서 걱정하는 말투는 없었던 것 같다. 우산을 안 가져간 나를 오히려 혼내시기도 하고, 젖은 옷을 빨리 빨아야 하니 얼른 벗어놓으라고 하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하루 세 번 삼종 기도를 하시는데, 평화 방송을 하루 종일 틀어두시고 집안일을 하셨다.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기도문을 외우게 된 것은 외할머니가 반복으로 들려주신 기도문 덕분이었다. 외할머니는 성당 활동도 열심히 하셨던 것 같다. 나는 가끔 외할머니와 함께 레지오 단원들과 아픈 환자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어린 여자 아이가 할머니들과 함께 다니니, 어른들이 기특하고 예쁘다며 많이 귀여워해 주시고 맛있는 것도 챙겨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워낙 말투가 거치시고 상냥하시지 않으셔서 나는 그렇게 외할머니를 따라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외할머니가 기적의 주인공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외할머니는 혈소판 장애로 죽을 고비가 있으셨다고 한다.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헌혈을 받아야 했는데,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서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때 외할머니의 연세가 60세 정도였다고 한다. 다니던 성당에 새 성전이 건축되어 김수환 추기경님이 새 성전을 축복해 주시러 오시는 날, 외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꼭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외할머니는 추기경님을 보자마자, 그분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살고 싶다고 크게 울었다고 했다. 그 후 신기하게도 외할머니는 건강이 기적적으로 괜찮아지셔서 외할머니를 담당한 의사들도 의아해할 정도라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는데, 터무니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기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엄마가 병원에서 명예퇴직을 하시고 난 후, 몇 년 동안 하루 종일 잠만 주무실 때, 학교에 다녀오면 엄마가 집에 계셔서 난 좋았지만, 살림을 맡아해 주시는 외할머니도 집에 계셨기 때문에 나는 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어느 날에는 아빠 흉을 보시는 외할머니가 너무 미워서 엄마에게 외할머니가 더 이상 집에 오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서러웠던 나는 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서 나와 아파트 앞에서 외롭게 울었다. 그때, 나에게 “힘들지?”라고 물어본 사람은 외할머니도, 엄마도 아닌, 큰 외숙모셨다. 맏며느리였던 큰 외숙모 또한 외할머니의 쏘아붙이는 욕 섞인 말투에 많이 상처를 받으셨던 모양이다.


내가 외할머니에 대해 늘 생각했던 것은, 외할머니는 이렇게 신을 독실하게 믿으면서, 아픈 병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기도하러 다니면서, 왜 내가 사랑하는 우리 아빠의 흉을 보는 걸까?, 왜 아빠를 싫어하는 걸까? 였다. 외할머니가 싫었고, 외할머니가 믿는 종교도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점점 커가면서 나는 외할머니와 왕래가 드물게 되었고, 그리고 유학을 오게 되었다. 그 사이 세월은 외할머니를 노쇠하게 바꾸어 놓았다. 70대에 치매 진단을 받으시고 큰 외삼촌이 24시간 동안 집에서 외할머니를 돌보시기를 10여 년. 큰 외삼촌도 집에서 어머니를 간병하는 것이 힘에 부치셔서 결국 외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게 되었다. 처음 간 요양원에서 고관절 골절로 수술, 그 후에는 욕창이 심해져서 서울의 병원과 좀 더 가까운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내가 유학 중에 한국에 나올 때 외할머니를 뵈러 요양원에 가끔 갔는데,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모습과 매우 달라서 충격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랜만에 손녀딸을 본,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외할머니는 내가 오빠의 부인인 줄 알고 한참을 얘기를 하셨다. 그러고 얼마 후에 나와 엄마만 방문했을 때는 단번에 나를 알아보시고는, 보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미워했던 외할머니가 나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때 외할머니를 보고 와서 한참을 울었다. 외할머니가 나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씀을 하는 순간, 내가 외할머니를 미워했던 것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나의 미움의 방에서 외할머니는 스르륵 사라져 갔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그게 전부이다. 다시 학기가 시작하여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나가는 동안, 외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 말씀으로는, 돌아가시기 전 날, 외할머니를 요양원에서 뵙고 오는데, 사람도 잘 못 알아보시는 외할머니가 삼종 기도를 하셨다고 했다. 그 모습이 우리 엄마가 기억하는 외할머니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외할머니를 더 이상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슬퍼하는 우리 엄마를 위해 기도했지, 외할머니를 위해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나에게 상처를 많이 준 분이시고, 내가 사랑하는 아빠를 미워했던 분이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한 번도 산소에 찾아간 적이 없었다. 외할머니에 대한 미움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또한 마치 오래전에 잊힌 존재처럼 내 마음속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차가 없으면 가기 힘든 곳에 위치한 산소는 운전이 가능한 아빠가 동참해 주어야 방문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아빠 역시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산소를 들른 적이 없기에 나도 그렇게 외할머니의 존재를 마치 없던 것처럼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 외할머니를 용서하고, 또 외할머니를 미워한 과거의 나에서 성장하게 된 것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였던 것 같다. 나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부모를 잃은 심정을 느끼게 되었고 우리 엄마가 외할머니를 보내드렸을 때의 마음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겪은 상실을, 엄마도 겪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엄마도 그녀의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남편이 외할머니 산소에 가고 싶다고 했다. 장모님이 친정 엄마가 많이 보고 싶으실 텐데, 멀기도 하고 차가 없으면 갈 수 없는 산소라서 본인이 모시고 가고 싶다고 했다. 고마운 남편 덕에, 나 역시 처음으로 외할머니의 산소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처음 가본 외할머니의 산소는 평온한 곳에 위치한 천주교 묘지였다. 늦게나마 나를 키워주셨던 외할머니의 산소에 방문하게 되니 그동안의 미움과 서운함은 맑은 하늘 어딘가로 사라지고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만이 나의 마음속 방에 남아있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외할머니의 일생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금이라도 이해가게 되었고, 외할머니 또한 받은 사랑이 부족하여 손녀딸에게 사랑을 줄 줄 모르셨던, 불쌍한 여인이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비록 외할머니는 따뜻한 분은 아니었지만,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오빠와 나를 키워주셨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해 보니 외할머니는 따스한 말보다 여러 반찬으로 가득 찬 식탁과 깨끗하게 청소된 집으로 손주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신 게 아니었을까 싶다.



2. 오빠의 이야기


오빠는 나보다 5살이 많다. 어릴 때부터 매우 산만하고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난폭한 성격이 걱정되었던 우리 엄마는 아들에게 형제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시고 오랫동안 둘째를 원하셨다. 5년 후 둘째가 생겼고, 내가 태어나자마자 우리 오빠는 나를 많이 괴롭혔다고 한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갓난아이였던 나를 툭 치며 울리고 갔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또 다른 경쟁자인 여동생이 미웠던 것이다. 유년 시절에도 오빠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가끔 오빠와 단 둘이 길을 걷게 되는 때면 오빠는 늘 나에게 따로 떨어져 가라고 했다. 엄마의 말로는 오빠보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동생이 자신의 외모와 많이 차이가 나서 가까이 있는 게 싫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오빠는 나를 그냥 미워했던 것 같다. 그냥 심심해서.


어릴 적 오빠는 나의 배를 자주 찼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 오빠는 내가 컴퓨터를 하는 걸 싫어했는데 바탕화면에 새로운 아이콘이나 팝업광고가 뜰 때마다 내가 컴퓨터를 한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나의 등짝을 때리고 발로 배를 찼다. 지금 생각해 보니 5살 위인 오빠가 여동생의 배를 발로 찬다는 것이 정말 위험할 수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신체가 멀쩡한 게 다행인 것 같다.


오빠의 폭력이 점점 줄어든 건, 오빠가 고등학생이 되고 학업에 열중하게 되면서였던 것 같다. 어린 나는 힘도 없어서 때리는 오빠한테 소리밖에 지를 수 없었고, 오빠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서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나는 오빠를 매우 무서워했지만, 또 부러워하고 동경했다. 오빠는 명문대에 입학하였고, 대학에서 높은 학점을 유지하면서 여행 동아리 활동을 활발히 하며 따르는 선후배들도 많은, 그야말로 엄친아 같은 대학생이 되었다.


이윽고 내가 캐나다 유학을 가게 되면서, 오빠와의 사이는 더욱 소원해졌다. 나는 오빠와 1년에 한 번 얼굴을 보게 되니 어릴 때보다 오빠가 점점 덜 무서워졌다. 오빠가 날카로운 말투로 나에게 말할 때, 더 이상 나도 지지 않았다. 나도 오빠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할 만큼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교수가 되고 싶었던 오빠는 모교에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고, 그 사이 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엄마는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그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오빠는 그 누구보다 성공가도를 걷고 있는 엄친아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냉담하던 오빠가 다시 성당에 다니게 되면서 가톨릭 청년 성서모임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나에게 녹음 클립을 이메일로 보냈다. 그 클립을 들어보니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나에게 편지를 읽어주는 부분이었다. 오빠는 내가 자랑스럽고 대견하다고 말하며, 어릴 때 때리고 상처 준 것에 대해 많이 미안해한다고 고백했다. 그 말을 하면서 울먹거렸다. 나도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무섭고 미워하면서도 동경했던 오빠의 사과를 듣게 되다니… 오빠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오빠와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나와 엄마는 캐나다에, 오빠는 아빠와 단 둘이 살게 된 시기에 오빠가 아주 많이 힘들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빠가 그 누구도 부러워할 만큼 학업도 훌륭히 해내고,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교우들과 추억도 많이 만드는 행복해 보이는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오빠가 힘들었다니 놀라웠었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어릴 적 오빠에게도 불안한 가정으로 인한 애정결핍이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성인이 된 오빠였지만 엄마의 부재로 인한 심적 충격이 매우 컸던 것 같다. 오빠는 나를 버리고 여동생을 선택한 엄마가 밉기도 했다고 했다. 대학원 진학 역시 원래는 대전으로 생각했었는데 서울에 혼자 계시게 될 아빠가 걱정이 되어 포기하고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모교의 대학원으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는 점도 충격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학으로 인해 엄마와 아빠만 희생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빠에게서 엄마를 빼앗아갔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고 오빠에게 미안해졌다. 그 미안함은 내가 더 성공해야겠다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오빠가 종교적으로 위로와 치유를 받으면서, 좀 더 부드러워졌음을 우리 가족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오빠는 그때 성당 모임에 아주 열심이었는데, 그 모임에서 같이 활동하던 지금의 새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가 정말 이혼을 결심하시면서 이혼 서류를 쓰고 갔던 그때, 오빠는 결혼을 결심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오빠는 이 시기, 혹시 부모님의 이혼으로 본인의 결혼이 깨질까 매우 불안해했던 것 같다. 늘 소원했던 부모님이 익숙했던 우리들이지만 지금에 와서 법적으로 이혼을 한다는 것은 좀 뜬금없는 일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미국에서 내가 유학 중이었을 때, 엄마와 아빠 사이의 신뢰가 통째로 사라졌던 일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엄마는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이혼을 실천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오빠는 엄마와 아빠 중간에서 중재를 하며 두 분의 이혼을 말렸다. 엄마에게 들은 얘기로는 이혼을 하더라도 본인의 결혼식이 끝난 후에 하라고, 제발 몇 달 만이라도 미루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아들의 애원에 부모님은 이혼을 미루시게 되었는데, 나는 그런 오빠가 안쓰러우면서도 엄마 아빠의 행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미성숙하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 아빠가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이혼하는 편이 덜 불안하겠다고 늘 생각했던 딸이었는데, 나도 과연 결혼을 앞뒀다면 이혼을 하려는 부모님을 이렇게 말렸을지, 생각해 보면 나와 오빠는 같은 가정에서 자랐어도 매우 다른 사람으로 자란 것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오빠 역시 평생 불안한 가정에서 자라왔는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중요한 순간에 다시 한번 발목이 잡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걸 나 역시 결혼준비과정을 겪은 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나와 오빠는 같은 부모님 아래서 자랐고 정말 다른 점이 많지만 같은 아픔을 겪었기에 내가 결혼생활을 하며 상처를 치유해 나갔던 것처럼 그 역시 행복한 가정에서 그 상처를 치유했으면 한다.




부모님 다음으로 저에게 큰 영향을 준 외할머니와 오빠의 이야기까지 이렇게 털어놓으니, 정말 제가 가지고 있던 상처들을 다 공유하게 되었네요. 보고 싶었다는 말에 눈 녹듯 녹아버린 외할머니를 향한 저의 미움, 그리고 어릴 때 때려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해 준 오빠의 라디오 사연에 희미해진 오빠에 대한 미움은 이제 저에게는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두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상담을 하며 제 안에 있는 상처 많은 어린아이를 탐구하다 보니 저절로 저의 마음이 그렇게 되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어서 존재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인생살이가 힘들다 보니 나의 힘듦에 기여한 여러 사람들을 향한 상처들이 내가 그들을 미워해야만 내가 덜 억울한 느낌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하지만, 미움은 그 누구보다 미워하는 자기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남을 향해 쏘았던 미움이 결국 스스로에 대한 미움으로 돌아오게 되니까요. 제가 성장하게 된 것은 저의 상처들을 들추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상처들을 공유하는 것을 꺼리지 마세요. 자꾸 반복해서 끄집어내야 정말 상처가 아닌 것으로 승화된답니다. 단 한 분이라도 저의 조언으로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시작되는 저의 해외 살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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