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엄마의 성장
우리 엄마는 3남 1녀 중 고명딸로 서울 종로의 큰 고택에서 자랐다. 엄마의 할아버지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신 법무사로 크게 부를 축적하게 되셨는데, 엄마의 어릴 적 집에 방이 9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전화기와 텔레비전이 있었고, 바나나와 미제 식품들이 늘 집에 있었다고 한다. 엄마의 할머니는 겨울이면 양장점에서 모직 코트를 맞춰서 손녀딸을 입히셨는데 모직 코트를 그 당시 입고 다니는 아이는 엄마뿐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부자로 살았던 어린 시절, 엄마에게 결핍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나의 외할아버지, 즉 엄마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정신 질환을 앓고 계셔서 가까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신 후, 사회에 막 발을 디디려는 그때, 민족의 비극 한국 전쟁이 발발해 징발된 후 겨우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기고 말았다. 전쟁의 상흔이 지워지지 않으셨던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시다가 소리를 지르시기도 하고, 또 바이올린을 새벽부터 연주하시다 화를 내기도 하셨던 그는 엄마에게 정상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이런 아들이 걱정되었던 엄마의 조부모님은 시골에서 한 처녀를 데려와 아들과 혼례를 시키셨다. 남편이 마음이 아픈 사람인 줄 모르고 결혼하게 된 엄마의 어머니는 속아서 결혼했다며 본인의 신세를 자주 한탄하시고는 하셨다고 한다. 그런 며느리에게 미안했던 시부모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뜨개질기술을 직업적으로 키워 나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어릴 적 엄마는 부모님으로부터의 사랑은 잘 받지 못했지만, 양육자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해 주신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귀하게 자라셨다.
2. 간호사로서의 엄마
엄마가 아직 어릴 적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 후 엄마가 고3 때, 여섯 식구의 가장이자 기둥이었던 엄마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엄마의 인생은 급격히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하였다. 엄마의 할아버지만의 재산으로 3대가 유복하게 생활해 왔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그 당시 취업 준비생인 엄마의 오빠도 아직 돈을 벌기 전이었어서 엄마의 어머니가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몇 년 후 엄마에게 든든한 존재였던 엄마의 할머니도 돌아가시게 되자, 엄마는 돈을 잘 버는 간호사가 되어야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간호사로서 엄마는 일을 아주 야무지게 잘하셨던 것 같다. 혈관 찾는 데는 선수여서 다른 병동에서 엄마에게 혈관을 잡아달라고 자주 호출을 할 정도였다고 으쓱대며 말씀하시고는 했다. 일하는 것이 뿌듯하기도 하셨지만, 엄마의 3교대 간호사 생활은 매우 고되셨던 것 같다. 엄마는 할아버지를 대신한 대가족의 가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 책임감이 막중했을 것이다. 쌀이 떨어지면 월급 어딨냐고 외치며 월급날만 되면 병원 앞에 서있던 엄마의 어머니의 매정함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하셨다. 엄마의 월급만으로 한동안 8명의 식구가 먹고살았다고 하시는데, 한순간에 몰락한 집안의 가장이 된 엄마의 삶이 얼마나 슬프고 힘들었을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3. 가정에서의 엄마
20대를 치열한 생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던 엄마는 서른 살의 늦은 나이에, 문득 남들 다 하는 결혼을 나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 맞선을 몇 번 보다가 똑똑하고 착실해 보이는 한 노총각과 1년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고, 오빠와 나를 낳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 엄마는 그야말로 냉랭했다. 어렸던 나는 오매불망 엄마를 기다리면서 한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엄마는 나와 자주 대화해주지 않았다. 칭찬과 격려는 인색하셨고, 내가 실수를 하거나 원하던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자책하고 있을 때면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기 일쑤였다.
엄마는 퇴근하고 집에 오시면 외할머니와 직장에서 힘든 일들을 털어놓으며 아빠에 대한 불만과 아빠 본가에 대한 불만 역시 빼놓지 않으셨다. 아마 3교대와 가장의 무게에 시달렸던 엄마는 딸을 품어줄 마음속 공간이 없었던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엄마!”하고 여러 번 엄마를 부르면 아무 대답이 없으시다가 짧으면 10분, 길면 반나절이 지나서야 “엄마 불렀었니?”하고 말씀하시고는 했다.
문학을 좋아해서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는 엄마의 어린 시절을 들어보면 엄마의 본성은 감성적인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러나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삶의 짐을 떠맡기 시작한 가장의 책무에 더해 수많은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의료인으로서의 삶이 엄마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바꿔버리고 말았다. 나는 엄마의 이 냉정함이 아빠의 마음 역시 얼어붙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4. 판도라의 상자
내가 중학생이던 무렵, 우연히 책장에서 엄마가 쓴 한 공책을 발견했다. 그 공책에는 엄마의 신혼 생활이 적혀있었는데, 매 글자마다 엄마의 불행함이 잔뜩 느껴졌다. 그 일기에는 신에게 도와달라는 문장이 많았다. 괴롭고 힘든 자신의 인생을 도와달라고… 엄마와 아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은 이미 웨딩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하게 된 엄마는 결혼식을 마치고 웨딩카에 탔는데 별안간에 아빠 직장 동료라는 어떤 여자가 차 뒷문을 열고 아빠 옆에 앉았다. 엄마, 아빠, 그리고 그 여자가 뒷자리에, 조수석은 비어있는 채로 그렇게 사랑과 전쟁에서나 볼 법한 불편한 동행을 하게 된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며 그 여자와 아빠에게 따지며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미 뱃속에 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물론 아빠도 그 상황에 대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엄마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그 여자가 아빠와 오랫동안 교제했던 사이인데 아빠와 헤어지고 난 후에 부잣집 아들과 교제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싫어’ 였던 걸까?
이 일에 대하여 아무 언급도 없던 아빠에게 엄마도 대화를 하지 않았고, 대화의 부재가 지속되며 엄마의 불신이 커지게 된 것 같다. 또 다른 불신의 이유로는 천주교를 믿던 엄마와 관면 혼배를 한 아빠가 자신은 무교이고 어머니는 불교를 믿는다고 말했는데, 알고 보니 남묘호렌게쿄(창가학회)라는 종교를 믿는 시어머니를 알게 된 것이었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던 엄마는 시어머니의 종교를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아빠에게 배신감이 크게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들의 위태한 결혼 생활이 더 악화되었던 계기로는 아빠가 번 돈을 모두 아빠의 본가에 가져다주었던 것도 있다. 즉 결혼 이후에도 가정의 모든 소비는 엄마의 월급만으로 해결했다. 아빠의 본가는 매우 가난했는데 아빠의 형은 직업 군인으로 일찍 출가하여 둘째 아들인 아빠가 집안의 가장이었다. 아빠는 결혼이라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해 버리셨던 같다. 결혼하고 5년 동안, 아빠의 월급을 엄마에게 한 번도 알려준 적도, 가져다준 적도 없다고 엄마는 일기에 적었다. 신혼집은 아빠의 뜻으로 아빠 본가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는데, 신혼집의 열쇠를 가지고 있던 시어머니와 또 종종 그 열쇠를 공유하던 시누이의 반갑지 않은 침입(?)으로 엄마의 신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시누이는 엄마의 결혼 예물인 시계와 액세서리들을 모두 훔쳐가서 남편과 시어머니에 말했더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말을 하고서는 다시 예물을 돌려주지도, 이미 팔아서 현금화된 예물의 값을 나중에 갚지도 않았다고 했다. 결국 부인을 우선시하지 않는 아빠의 그런 점 때문에 엄마는 오빠를 데리고 집을 나오고야 말았다.
가출 후 친정에서 며칠을 지내고 있던 엄마는 큰 외삼촌을 찾아온 아빠를 보고 다시 이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했다. 그 후 매달 아빠의 월급 중 100만 원은 엄마에게 드렸고, 엄마는 엄마가 버신 돈과 아빠의 100만 원으로 나와 오빠를 키우셨다. 아빠가 오빠와 나에게 용돈을 매달 주시긴 하였지만, 생활비는 엄마가 대부분 계산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내가 유학을 준비하면서 엄마는 아빠의 1억 넘는 연봉을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엄마의 반응은 배신감 그 자체였다.
내가 중학교 시절 엄마의 일기를 우연히 본 그날, 나는 엄마가 아빠의 본가 식구들을 왜 미워하는지, 왜 외할머니와 아빠 흉을 보는지, 또 왜 자주 얼이 빠지신 것 같은 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의 결혼 생활은 한 마디로, 결혼을 했지만, 본가로부터 독립과 분리를 하지 못한 남편 때문에 불행함의 연속이었다. 엄마가 이 삶을 이어 나가는 이유는 어쩌다 낳게 된 두 아이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나의 수고스러움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것 같은 종교적 믿음이었다. 엄마의 냉정함이 아빠의 마음 역시 얼어붙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틀렸다. 아빠의 무관심이 엄마의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하고 있던 것이었다.
5. 효자 아들과 소녀가장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와 엄마는 서로 닮은 점이 참 많았다. 장남 대신 쓰러져 가는 본가를 책임져야 했던 각 가정의 기둥, 그럼에도 높은 학업 성취를 일구었던 성공한 고학생, 믿을 만한 아버지상의 부재와 적절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한 어머니, 그로 인해 건강한 가정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한 채 숙제처럼 결혼해 버린 두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비슷한 처지에서 성장한 두 사람은 서로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둘에게는 비슷한 점보다는 다른 점들이 더 많았다. 다행히 형제들이 잘 풀리며 가장의 의무에서 해방된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끝없이 문제를 일으키며 사회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는 형제들을 여전히 건사해야 했던, 더욱 불행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친할머니는 두 집 살림을 하던 할아버지 대신 아빠에게 크게 의지했기에 결혼한 후에도 아빠는 친할머니의 남편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아빠는 엄마와 결혼식을 올렸지만 할머니가 아빠의 부인이었고 형제들이 아빠의 자식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아빠는 엄마와 결혼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소통의 방식 역시 두 사람이 크게 다른 점들 중 하나였다. 감정표현을 최대한 아끼는 아빠와 말을 끊임없이 쏘아붙이는 엄마는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단순한 의사소통은 오고 갔으나 마음이 오고 가는 소통이란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고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것 같던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진정으로 보듬어주지 못했다.
효자 소년가장과 독설가 소녀가장에게 결혼이란 무슨 의미였을까?
어린 시절 저는 어머니에 대해 원망이 많았던 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칭찬과 격려를 해 주시는 분이지만, 어머니는 인색하셨거든요. 외할머니와 아빠의 흉을 보는 엄마, 아빠와 언성 높여 따지시는 엄마, 저와 대화를 안 해주셨던 엄마에게 “엄마는 나쁜 엄마야!”라고 종종 얘기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일기를 읽게 되면서 그런 엄마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캐나다에서 엄마와 단둘이 함께 지내면서 엄마의 이야기들을 더 듣게 되었지요. 외롭고 힘들었을 그 시절의 우리 엄마를 꼭 안아주고 싶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