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구리에서 약대생으로

by 티나


1. 밑바닥을 쳐봐야 올라올 수 있다.


약대 진학에 실패해 버린 나의 한국에서의 나날은 무기력함으로 가득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타지에서의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던 나였다. 나는 그 어떤 때보다도 내가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완벽하게 해내며 잘 지내고 있었던 씩씩한 소녀였다. 그동안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준 모두에 대한 감사한 마음, 꼭 이곳에서 성공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굳건한 마음뿐이었는데, 어쩌다가 나는 이런 꼴이 되었을까? 조금만 더 나아가면 빛나는 결승점으로 들어갈 것 같았는데 그 한 걸음이 부족해 다시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계획했던 대로, 기대했던 대로 모든 일들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압도되어 폭식증이 심해지고, 너덜너덜해진 내 연약한 마음은 더 이상의 도전을 거부하고 있었다. 모범적인 유학생 그 자체였던 나는 한순간에 패배자가 된 느낌이었다.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종일 차갑고 검은 타르 속에서 허우적대는 느낌. 그 어떤 것에도 감흥이 느껴지지 않고 맑은 하늘을 봐도 그저 눈물만이 나왔다. 나는 점점 메말라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심리 상담은 이 구렁텅이에 빠진 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 같다. 상담사의 질문들에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이어가며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던 아빠, 엄마, 외할머니와 오빠에 대해서 몇 달 동안 이야기했다. 사실 한동안은 심리 상담을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이 후련하기보다 내 인생이 더 우울해짐을 확인받는 느낌이었다. 깊은 곳에 대충 덮어놨던 아픈 상처를 다시 한번 끄집어내어 후벼 파야 했으니까. 그 상처 속에는 아무에게도 표현하고 내보일 수 없었던 나의 어두운 감정들이 꾹꾹 구겨 넣어져 있었다. 가장 깊은 감정을 건드렸던 날은 상담이 끝나고도 그 여운이 한참을 갔다.


상담을 받아보면서 나에게 상처가 된 줄도 몰랐었던 그런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고, 왜 그때 나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상처를 준 당사자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유일하게 나의 상처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털어놓은 상대는 유독 엄마였다. 나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가 가장 컸던 것 같다. 엄마에게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라며 자주 물었다. 그러다가 솟구치는 감정에 주체를 할 수 없이 엉엉 울었다. 그걸 보고 있던 엄마도 미안함에 그만 눈물을 흘리시고 나를 안아주셨다.


아빠는 유학생활 중에 힘들면 언제든 한국에 돌아오라고 했는데, 막상 딸이 한국으로 돌아오니 사뭇 놀라셨던 것 같다. 아빠는 분명 집에서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있다가 상담을 하러 가는 딸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셨을 것이다. 가끔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물어보셨는데, 많이 힘들어하던 사랑하는 딸에게 표현이 서투신 아버지가 나름 위로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오빠는 대학원생으로 거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어서 별다른 교류가 있지는 않았다. 아침은 거의 엄마와 단 둘이 먹었고, 저녁은 엄마, 아빠와 함께 먹었지만, 점심은 대부분 나 혼자 먹게 되었다. 집에 있는 반찬들을 꺼내먹기도 하고, 인스턴트식품들을 간단히 조리해서 먹기도 했다. 가끔 과자 한 봉지를 다 먹는 날도 더러 있었지만, 미국에서 지낼 때만큼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짧은 시간 안에 다 먹어버리는, 야만적인 습관은 다행히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 폭식증이란 건 "너무 외로워!" 라며 내 마음이 외치던 한 줄기 비명이었다는 걸 이때서야 깨달았다.


이 시기에는 특이하게도 매 순간마다 끊임없이 잠이 쏟아져왔다. 과장 하나 없이 하루에 10시간 정도는 잠을 잤던 것 같다. 1-2달 정도는 그저 잠에 허우적대면서 깨어있는 동안에는 여러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보고 싶은 드라마, 영화, 책들을 다 정복했다. 감성적인 작품들을 마주칠 때면 괴로운 내 현실을 잠시 잊고 금세 작품 속에 그려지는 여러 사람들의 인생에 실감 나게 녹아들었다. 내 인생을 잠시라도 잊어버리는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소중했다. 산통에 시달리다가 무통주사를 맞은 임산부의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부모님과 주변인들이 치열하게 일상을 헤쳐나가는 시간 동안 나의 시계침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상담 덕분인지 엄마의 집밥 덕분인지 비록 화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족의 테두리 안에 속해있는 안정감 덕분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깊은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어찌어찌 한국에서의 고통스러운 여름이 무사히 지나가고 바스락거리는 찬 공기가 유독 반가운 가을이 왔다.


한국에서 가을을 지내는 것이 몇 년 만이었을까? 특히 이 가을은 내가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지내게 된 첫가을이었다. 물론 아직 휴학 중이었기 때문에, 나의 직업은 아직 학생이었으나, 학업에서 잠시 벗어났기 때문에 학생이라는 소속감이 없어져 깊은 상실감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침저녁으로 보이는 책가방을 멘 여러 학생들의 일상들이 부러웠다. 나도 저들과 함께 치열하게 나의 삶을 발전시켜야 하는데, 정작 앞으로 가기는커녕, 초고속으로 뒤로 밀려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정말이지 앞으로 갈 힘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아직 학교로 돌아갈 자신은 없었지만, 생산적인 삶을 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요리와 베이킹. 그러나 취미처럼 즐겨야 했던 요리와 베이킹 코스는 나의 강박과도 같은 완벽주의 때문에 나의 마음을 다시금 갉아먹는 의무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 취미 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버린 나는 어느새 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덜너덜해진 동생을 가까이서 보며 안타까워한 오빠가 청년 성서모임을 추천했다. 창세기 공부를 한 학기 동안 마치고 연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유아 세례를 받아 맹목적으로 엄마 따라 신앙인이었던 나의 신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들을 보게 되었고, 그 상처들을 서로 위로하고 기도하며 마음속에 작지만 확연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깊은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이 시기가 내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나락까지 굴러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 이제 좀 바꿔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내 인생, 끝난 거 아니지 참!


한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볼까도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상처를 준 가족들이 살고 있지만 그 어느 곳보다 익숙한 고국. 하지만, 수 백 번을 넘게 생각해 보아도 내가 한국에서 어떤 직업을 할지, 어떤 사람으로 한국 사회에 녹아들어 사회인이 될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그 당시 들었던 감정은 한 마디로 큰 물에서 놀고 싶었다는 마음. 미국 사회에서 주류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전문직은 내가 생각하는 아메리칸드림과 같은 길이었고, 약사라는 직업은 신분도 불안정하고 (미국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었으므로) 영어도 완벽하지 않은 비주류인종이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티켓 같은 느낌이었다. 한 번 떨어지면 어떠랴, 다시 도전하면 되지 않겠는가? 한국에서의 6개월 동안 나는 내가 굴러 떨어질 수 있는 가장 깊은 심연까지 추락했다. 하지만, 적재적소에 나타난 수많은 은인들이 나를 이 어둠에서 끌어내기 위해 손을 뻗어주었다. 마음의 어둠이 걷힌 내게 다시금 목표가 생겼다.


미국 약대 재수하기!


3. 약대 입학의 꿈을 이루다.


한국에서 늦가을부터 미국의 여러 약대에 원서를 보냈다. 내가 지난해에 떨어진 모교의 약대는 지원하지 않았고, 그 이외 10개 정도의 약대에 지원서를 썼던 것 같다. 미국에서 약대는 1차 서류 면접과 2차 인터뷰로 나누어지는데, 10개의 약대 중에 5군데에서 인터뷰 초청 이메일을 받았다. 동부의 세 학교와 중부의 두 학교였다. 인터뷰를 비슷한 시기로 맞춘 후, 2주 간 다섯 학교에서의 인터뷰를 위해 정장 한 벌을 싸들고 미국으로 향했다. 중부와 동부에 위치한 5개 대학교들을 가기 위해 2주 동안 비행기를 몇 번이나 탔는지 모르겠다. 내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다행히 두 학교에서 최종합격증을 받았고, 한 곳에서는 대기자 명단에 올라갔다.


하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 가고 싶은 약대는 정해져 있었다. 인터뷰를 볼 때부터 뿅 반해버린 학교였다. 가톨릭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100년이 넘은 그 학교에는 학교 정 중앙에 고딕 건물의 멋진 성당이 있었다. 그 성당에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난생처음 가는 곳이었는데도 오랜만에 친정에 간 느낌처럼 익숙했다. 인터뷰를 주관하신 두 교수님들도 참 따뜻하셨다. 이곳에서라면 내가 어떤 약사가 되더라도 좋은 약사로 이끌어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약대 재수 생활을 청산했고, 엄마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아빠는 내가 약대에 합격한 것이 대견하시면서도 다시 나라를 떠나 공부를 하는 딸이 조금 안쓰러우셨던 것 같다. 아빠와 울음바다로 마무리한 나의 한국생활에 이어 또다시 나의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먼저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 보관해 두었던 짐들을 정리해서 약대가 위치한 도시로 이사했다. 엄마와 일단 학교 근처 호텔에서 이틀을 지나면서 아파트를 알아보았고, 일사천리로 아파트를 계약하고, 학교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도 샀다. 잦은 이사 탓인지 오랜 타지생활 탓인지 몇 년 전에 캐나다에 왔을 때보다 익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내 자신을 보며 내가 많이 성장하고 발전했음에 감사했다.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약대 동기들과 여러 번의 신입생 활동들을 하며 본격적으로 학업이 시작되기 전 친목을 쌓았다. 100여 명의 동기들은 미국의 각지에서 왔는데 한국인 친구들은 5명 정도 있었고,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는 해외 유학생은 한국 국적의 나, 필리핀 국적의 친구, 케냐 국적의 친구까지 총 3명이었다. 내가 무사히 약대를 졸업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수많은 경쟁을 뚫고 이런 멋진 친구들과 나란히 약대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는 것에 어깨가 으쓱했다.


미국의 의대, 치대, 약대에서는 학기 초에 ‘흰 가운 축하식 (White Coat Ceremony)’라는 행사가 열리는데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이 행사가 열려서 내가 처음으로 흰 가운을 입게 되는 그날을 엄마가 지켜보셨다. 아름다운 우리 학교의 성당에서 열려서인지 좀 성스러운 느낌이 나는 이 행사에서 우리 모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저 동양인 모녀는 무슨 사연으로 저렇게 눈물을 흘릴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다. 이 행사는 우리 모녀에게 어두웠던 시기를 뛰어넘고 다시 한번 도약을 해냈음을 증명하는 축하식과 같은 느낌이었다.




제가 사연이 좀 많지요? 그래도 쭈구리였던 제가 어찌어찌 약대생이 되었어요! 하지만 진정한 고난은 그때부터였다는 걸 왜 몰랐을까요? 이번 주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추석 명절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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