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대 1학년
약대에 입학하고 흰 가운 축하식을 마치자마자 본격적인 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터치 스크린이 가능한 좀 무거운 노트북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와는 달리 두꺼운 종이책보다도 전자책이나 파워포인트 수업 자료로 세대교체가 되던 시기라 노트북은 필수였다. 퀴즈나 시험도 다 이 노트북으로 치르기 때문에 이 노트북은 앞으로 4년 동안 나와 약대라는 전장을 헤쳐나가는 전우나 마찬가지였다. 학부를 다닐 때는 미리 수업 자료를 도서관에서 프린트하여 펜으로 필기했는데 터치 스크린에 스타일러스 펜으로 필기를 하는 세상이라니… 정말 몇 년 사이에 세상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노트북이 가끔 말썽을 일으킬 때면 필기 자료들이 모두 없어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기도 하였지만 나의 어깨를 짓누르던 수많은 종이책과 작별했다는 기쁨이 더욱 컸다.
나의 약대 본과 첫 학기는 대체로 수월하게 흘러갔다. 100여 명의 동기들은 고등학교 때와 같이 소그룹으로 이루어지는 그룹 수업을 제외하고 매일 같은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몇 개월 안에 모든 친구들의 이름을 외우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아주 가까운 오래된 아파트 원룸에 살았다. 내가 살던 아파트 바로 옆에는 신입생들이 많이 사는 학교 기숙사 건물이 있었다. 아파트에서 조금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오면 굴다리라고 불렀던 고가 도로 밑이 나오는데 그 길을 무단횡단으로 길을 건너면 (죄송합니다!) 바로 학교였다. 걸어서 코 닿을 거리였지만 기숙사 건물이 옆에 있어서인지 학교에서 운영하는 공짜 셔틀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나와 같은 아파트나 기숙사에는 동기들과 선배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셔틀버스를 타서 수학여행 버스 같은 느낌마저 났던 기억이 난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제니퍼라는 친절한 매니저가 있었다. 제니퍼는 필리핀계 여자였는데 아주 상냥하고 잘 웃는 분이었다. 아침에 마주칠 때면 “굿모닝!”이라고 활짝 웃으며 먼저 인사해 주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아침에도 상냥한 제니퍼의 인사에 나도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굿모닝!”을 외치고 나면 신기하게도 좋은 아침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와 토론토에서 살 때 매일 보았던 아파트 매니저인 무뚝뚝한 마크와는 전혀 달랐다. 제니퍼는 매일 아침 로비에 커피를 끓여두었고 가끔 마트에서 사 온 쿠키나 머핀도 테이블 위에 두고는 했다. 제니퍼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제니퍼가 끓인 커피는… 그렇게 맛있지 않았다. 탄 한약 같은 맛이랄까? 나는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잠을 깨려고 녹차나 홍차를 마셨는데, 미국에서 학부를 다니면서 커피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잠이 많은 내가 졸음을 이기고 공부를 해야 하니 매일 아침 카페인은 필수였다. 아무리 생존을 위한 커피이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제니퍼가 끓인 커피는 정말 맛이 별로였다. 하지만 고학생에게 공짜 커피는 감지덕지였기에 나는 쓴 약을 먹듯이 아침마다 자주 로비에서 텀블러 가득 커피를 채우고 마시고는 했다. 지금은 속이 쓰리고 몸이 가려워서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1학년 1학기에는 5과목, 2학기에는 7과목을 들었는데 수업 난이도는 학부 과정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학년 때 그나마 좀 어려운 부분이었던 것은 제약학 교수님의 수업을 알아듣는 것이었다. 미국에는 이민자 출신들이 많아서 정말 각양각색의 영어 발음들이 있지만, 이 교수님의 인도식 영어 발음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수업 녹음을 여러 번 들어야 이해가 되었다. 이 교수님의 영어 발음 때문에 제약학 과목을 공부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리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수업 난이도를 따지자면 1학년 수업 과정은 쉬운 편이었다. 첫 주 수업이 끝나고 동기들이랑 우리 이렇게 쉽게 공부해서 약사가 과연 될까 하는 의문과 걱정을 얘기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약대 선배들을 알게 되면서 2학년부터 공부가 아주 많이 힘들어질 거니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었다. 1학년 때 많이 놀고 즐기라는 조언은 덤이었다. 내년에 공부가 얼마나 어려워진다는 것일까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드디어 약사가 돼서 써먹을 수 있는 학문들을 배우는 것이 다행인 마음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더 많은 친목활동을 위해 동아리도 가입했다. 동아리에서는 신약에 대해서 공부를 함께 하거나 기금 마련을 위한 쿠키나 간식거리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하고, 음악이 틀어진 버스를 타고 여러 바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한국에서 1년을 쉬었어서인지 그토록 원하던 약대에 합격해서 그런지 공부도 집중이 잘 되었고,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난 누구보다 학교 생활을 완벽히 해내고 있었다. 폭식증도 일어나지 않았다.
2. 약국 아르바이트
미국은 본과 1학년부터 인턴으로 약국에서 일할 수가 있는데, 동기들의 1/3 정도는 학기 중에 약국에서 일을 구해서 짧게는 1주일에 10시간, 길게는 20시간 이상까지 일하고 있었다. 미국의 약사는 커뮤니티 약사, 병원 약사, 임상 약사, 제약 회사 약사, 식약처와 같은 기관에서 약의 안전성을 심사하고 여러 법률을 규제하는 약사, 그리고 심장학과, 신장과, 당뇨, 암, 소아과 등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은 전문 약사로 나누어진다. 대부분의 약대 졸업생들은 대형 체인 약국이나 소규모 개인 약국에서 일하는 커뮤니티 약사나 병원 약사로 진로를 정하게 된다. 성적보다 경험이 중요한 미국에서 유학생 신분인 내가 약사로 취업을 하기 위해서 업무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학생 비자 신분인 나는 학교 외부에서는 일을 할 수가 없고 학교에서만 일을 할 수 있었는데, 몇 개월의 기다림 끝에 학교 병원 외래 약국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내가 인턴을 했던 병원 외래 약국은 오전 9시에 열고 오후 6시에 닫는데 두 명의 스탭 약사들과 한 명의 약국장, 두 명의 보조인력이 그 약국의 일원들이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일하고 있던 약대 선배들도 두세 명이 번갈아가며 몇 시간 정도 일하거나 수업이 없는 날에 하루 종일 일하기도 했다. 병원 1층에 있는 외래 약국이다 보니 병원에서 퇴원하여 약을 타가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교직원들과 그의 가족들도 많이 왔다. 사람을 돕는 것이 좋았던 나는 약국에서 뿌듯한 나날들을 기대하며 인턴으로서의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약국에서의 일은 뿌듯함은 짧고 대부분은 고되었다.
먼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에게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 미국에서의 전화통화는 너무나 어려웠다. 어렸을 때도 중국집에 주문전화를 하려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몇 번이고 리허설을 해야 전화를 걸 정도로 전화통화가 두려운 나였다. 그런 내게 수많은 나라 출신들의 영어 악센트로 펼쳐지는 가지각색의 요청사항이나 불만, 거기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각국의 다양한 이름들과 외계어 같은 약 이름들을 이해하고 받아 적는 것은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 지금도 가끔 버벅거릴 때가 있는데 그때는 얼마나 막막했었는지 모른다.
전화통화 다음으로 내가 배운 일은 계산대에서 약사들이 다 체크한 처방 약들을 계산해 주는 것이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잘못하면 다른 환자의 약을 주는 큰 실수를 할 수 있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하루 종일 서있어야 하는 것이 약국에서의 인턴 생활이기에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오히려 감정 노동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국가보험이 아닌 실비보험 같은 민영보험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환자의 입장에서 의료진이 처방한 약들을 보험사에서 온갖 이유를 들면서 실비적용을 안 해준다고 하면 바로 앞에 서있는 약국직원들에게 화를 많이 낸다. 나는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에 욕을 하고 화를 내는 환자에게 어떤 말을 해야 화가 수그러들지 잘 몰라서 서툴렀다. 긴 진료를 마친 환자들이 집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 약국이다 보니 빨리 약을 타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정말이지 어떤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다. 그런 환자를 대한 후에는 서운함이 오래가서 몰래 뒤에서 울기도 했던 것 같다. 다른 약국 직원들이 그런 진상 환자들을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해결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도 졸업할 때쯤이면 그렇게 성장하게 될 거라 믿었다. 나도 저렇게 침착하면서 환자의 감정들을 잘 들어주며,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저런 약사가 되어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무리 힘들고 험한 말들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때 다른 일을 찾았더라면 내가 좀 더 죽음에서 멀어질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성공한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3. 네가 약대를 다니니?
그렇게 1학년을 무사히 잘 보내고 여름 방학을 맞은 나는 한국에 갔다. 제약회사를 다니시던 아빠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셨는데 제약 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싶었던 나는 아빠에게 혹시 아빠 회사에 여름 방학 인턴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아빠는 다른 임원들과 동기들과 얘기하여 본사에서 1달, 그리고 연구소에서 1달의 인턴 프로그램을 짜 주셨다. 나와 같은 시기에 미국의 다른 대학교를 다니는 한 친구도 함께 인턴을 하게 되었는데, 혼자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었다. 이 친구는 아버지가 한국의 어느 대학교에서 교수님이신데 나처럼 인맥으로 이 제약 회사에서 인턴을 하게 된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때 우리 둘은 각자의 아빠의 빽으로 인턴을 하게 된 것이었으니 낙하산 인턴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약대생이 되어서 아빠 회사에 인턴을 하게 되다니 어깨가 으쓱했다.
이 인턴 과정을 겪으면서 제약 회사에서 신약은 어떻게 개발되고 약의 안전성과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여러 동물 실험들과 임상 실험, 이 모든 과정을 제출하여 승인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한국에서 승인된 약들이 해외 다른 나라에 판매되는 여러 절차들을 배우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서 30년 동안 아빠가 몸 담아 일하셨던 직장에서의 아빠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아빠는 여러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아빠는 퇴직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나는 얼굴도 모르는 여러 분들이 “아, 네가 이사님 딸이구나!” 라며 반가워해주시며 간식도 챙겨주시고 좋은 말씀도 해주셨을 정도였다.
그 여러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한 분이 있다. 이 제약 회사에서는 임원들 거의 대부분이 약대 출신이었는데 우리 아빠가 거의 유일하게 비약대 전공이었다. 엄마의 말씀으로는 아빠와 라이벌인 직장 동료가 있다고 했는데, 그분을 뵙게 되었던 것이다. 그분의 얼굴을 보니 어릴 때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엄마 말로는 실세가 누구인지 계산이 빠르고 사내정치에 능해서 약간 얄미운 캐릭터라고 했다. 반면 아빠는 사내정치를 싫어하고 전통과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성격이라 이 분에게 밀렸다고 했다.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시고는 이 분이 나에게 처음 하시는 말이
“네가 약대를 다니니?”였다.
내가 느낀 말투가 ‘너 따위가 미국 약대를 다닌단 말이야?’ 같은 비꼬는 말투였다. 이상하게 생각했던 나는 집에 와서 엄마와 아빠에게 이 얘기를 해드렸더니 아빠는 허허 웃으시고, 엄마는 “그 아저씨 자식들이 다 잘 안 풀렸어. 너네 아빠랑 다르게 계산이 빨라서 줄을 아주 잘 섰지… 그래서 지금 사장까지 된 거잖아. 근데 자식 농사는 못 지었어. 너네 아빠는 약대 출신 아니라고 은근 무시했을 텐데 딸이 약대 갔으니 자식 농사는 너네 아빠가 훨씬 잘 지었지!”
고등학교 때부터 비싼 유학비를 써가며 월급쟁이 아빠의 지갑을 더욱 얇게 만들었던 나였다. 아빠의 인생의 일부를 제물로 삼아 나는 미국 약대라는 꿈을 꿀 수 있었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히 나는 부모님의 자랑이 될 수 있었다. 비록 그 아저씨는 사장이 되고 아빠는 정년퇴직을 앞둔 상황이었지만 그 아저씨에게 약대생이 된 나를 보여준 것이 아빠에게는 통쾌한 작은 승리가 되었으면 했다.
인턴 생활 두 달간 번 100만 원으로 엄마에게는 설화수 기미 크림을, 아빠에게는 안경을 맞춰드렸다. 나중에 아빠의 유품을 정리할 때 그때 아빠에게 드렸던 안경을 발견했다. 딸이 첫 월급으로 사준 안경이 참 좋으셨는지 거의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우리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다.
추석 잘 보내셨나요? 저와 남편은 미국에서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일을 하고 소소하게 밥 지어먹는 그런 날을 보냈어요. 무탈한 날이었습니다.
오늘 공유한 저의 약대 1년 차도 무탈했어요. 특별한 일이 없지만 무난한 날들이 가장 귀하고 소중한 행복이라는 것을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무탈하지 않은 저의 이야기 기대해 주세요. 오늘 모두들 무탈한 날 되시길 바라고 다음주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