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또다시 찾아온 휴학생활
대학생 때에 이어 또다시 휴학을 하고 나는 예전처럼 몇 달 동안 방콕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 잘 해내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파묻힌 나는 자꾸만 잠이 왔다. 원래도 잠이 많지만 몇 달 동안 바쁜 학교 생활과 한국에서 들려오는 나쁜 소식에 하루하루 스트레스가 쌓여갔었고 한국 땅을 밟자마자 그 긴장이 풀려버린 것 같았다. 비록 좋지 않은 일로 다시 본가에 복귀했지만 다시 만난 부모님의 둥지는 여전히 포근했다. 하지만 겉으로 펼쳐진 안정감 안에서 삐져나오는 불편함으로 인해 나는 다시금 바깥 생활을 갈구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상담사와 상담을 시작했고 헬스장에 열심히 다니며 운동도 했다. 출퇴근 시간이 겹치면 겨우 손잡이를 하나 사수하고 만석 버스와 지옥철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에 갇힌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마다의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했다.
내가 약대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아빠는 33년 다니시던 제약 회사를 정년 퇴직하시고 아는 지인의 특허 사무소에 다니게 되셨다. 내가 상담을 받는 상담소와 아빠의 회사가 가까워서 상담 예약을 일부러 오전 11시로 예약을 하고 상담을 마치면 아빠와 만나 점심을 먹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빠와 단 둘이 외식을 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사실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엄마와 자주 단 둘이 외식을 한 적은 많았는데 왜 아빠와 단 둘이 외식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빠와의 매주 한 번 점심 데이트는 내가 제안한 것이었다. 심리 상담을 받다 보니 내가 아빠의 이야기를 많이 아는 것이 없다고 느끼게 되었는데 집에서 아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매우 어려울 것 같아 아빠와 단 둘이 외식을 하며 아빠를 더 알고자 했다.
첫 상담을 마치고 아빠의 새 직장을 처음 찾아갔다. 유리로 된 칸막이 방 중 하나가 아빠의 사무실이었다. 아빠가 일하시는 곳은 예전에 다니셨던 회사보다 훨씬 작은 특허 회사였고 아빠의 이름이 새긴 명패가 놓인 책상에는 직책이 이사라고 쓰여있기는 하나, 왠지 모르게 초라한 느낌이었다. 다른 젊은 직원들은 다른 사무실에서 바빠 보이는데 아빠는 별로 업무가 많지 않은 것 같아서였을까? 아빠의 책상에는 이런 공책이 있었는데
몇 월 며칠: 김밥 2,000원
몇 월 며칠: 담배 10,000원
몇 월 며칠: 김밥 2,000원
몇 월 며칠: 조문 2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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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20,450원
이런 식으로 날짜와 금액이 적혀있는 아빠의 가계부였다. 아빠의 점심은 거의 매일 김밥이었다. 다른 직원들과 점심을 같이 드시지 않냐고 여쭤보니 젊은 직원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 사무실에 김밥을 가지고 와 편하게 드신다고 하셨다. 같은 사무소를 다니는 아빠와 나이가 비슷한 동료 직원과 몇 주에 한 번 점심을 먹는 그날을 빼고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말을 듣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아빠가 매일 김밥을 드시는 이유는 단순히 혼자 점심 외식을 하는 것이 불편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그때 약대 2년 차를 마쳤으니 이제 2년, 그러니까 4학기의 학비가 남아있어야 하는데 치료학 낙제로 한 학기가 더 추가되어 졸업까지 5학기의 학비가 남아있었다. 한 학기당 학비가 만 4천 불 정도가 되었으니 퇴직하신 아빠로서 매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아는 아빠는 예전부터 혼자 외식을 못 하시는 분이었는데 뭔가 초라하고 청승맞아서 싫으시다고 했다. 하지만 자식의 행복이라는 목표와 현실의 사정은 아빠의 그런 작은 자존심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자며 아빠 사무실의 미닫이 유리문을 밀며 나가시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니 눈에 눈물이 가득 차버렸다. 나는 수입이 뻔한 월급쟁이 부모님의 딸이면서 미국 유학이라는 너무 분수에 넘치는 꿈을 꾼 것일까?
아빠에게 엄마와의 불화에 대해서, 또 웨딩카 옆에 탔던 그 여자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다른 주제들은 술술 물어볼 수 있었지만 유독 그 주제에 대해서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아빠가 불륜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엄마에게도 오빠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을 나에게 말하실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혹시나 정말 아빠가 불륜남이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다. 아빠의 일로 인해 나는 더욱더 무너지고 그나마 있던 자존감마저 사라지게 될 것 같았다. 그 대신 나는 아빠의 어린 시절과 조부모님들에 대해 물어봤다. 말수가 워낙 적은 분이셔서 속 시원히 길게 말씀을 하시지는 못 했지만 그 작은 대화 시간 덕분에 나는 아빠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본 우리 엄마는 정상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분명 아빠와 이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가 결혼을 앞둔 아들의 간청으로 이혼을 미룬 상태인 여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별거하기는커녕 아빠의 밥을 그 어느 때와 다르지 않게 차려드리고 있었으며 아빠의 옷 가지를 평상시와 같이 세탁하고 집안일을 했다. 결혼한 후부터 수많은 갈등과 말싸움이 있었음에도 왜 우리 집의 불편한 공기는 내가 어릴 때 기억하던 그 정도의 무게로 똑같이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아빠와 다르게 엄마는 말이 워낙 많으신 분이시다. 워낙 수다를 좋아하셔서 친구와 전화를 했다 하면 1시간 이상은 기본인데 듣는 것은 잘 못하시고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좋아하신다. 엄마가 무정한 세상살이와 불행한 결혼 생활을 버틴 것은 엄마의 수다 덕분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런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미루기로 결심하고 난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렇게 본인이 궁금한 것을 잘 물어보시고 본인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엄마가 왜 아빠한테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실까 신기하게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자기는 불미스러운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던 그 이후 엄마는 아빠에게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에게 당신 남편은 여자가 있다고 알려준 아빠의 지인이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그 전화도 받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지인은 지방에서 신입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오빠에게도 전화를 여러 번 했었는데 오빠 또한 부모님의 일에 간섭하지 말아 달라며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실 것을 부탁했다고 들었다.
참 나의 부모님은 희한한 부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가정을 산산조각낼 만한 큰 스캔들이었는데 우리 부모님 사이의 불편한 공기는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은 채 나의 어릴 적과 변함이 없었다. 엄마는 미운 남편 밥을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이 차려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아빠를 그 사건 이후로도 똑같이 대하는 것이 엄마에게는 고행이고 아빠에게 내리는 벌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이상한 나라의 부부 같은 나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어떻게 하면 이 두 분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할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 나의 고민을 듣는 상담사는 매번 말했다. 그건 부모님의 몫이라고 말이다. 나는 부모님의 자식이지 부모님의 부모가 아니라고. 부모님의 인생을 걱정하지 말고 개입도 하지 않아야 하며 온전한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역시 아직 졸업도 못 한 처량한 휴학생 신세였고 비록 스물이 넘어 사회에서 ‘성인’이라고 불리지만 정작 주도적이고 독립적인 '성인'의 삶과는 전혀 반대되는 애송이스러운 나의 모습이 못나보였다. 어떻게든 이 시간을 견뎌내고 나의 삶에 좀 더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나는 부모님에게 미안하고 불편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고이 접어두고 나의 인생을 아름답게 그려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로는 더 이상 부모님의 관계로부터 오는 불편함으로 나를 상처 주지 않게 되었고 학업 역시 척척 잘해나갔다. 한 학년 유급을 하게 되어 입학 동기들과 함께 졸업을 못 하게 된 건 속이 쓰렸지만 나만의 길을 걷자고 다시 다짐하는 계기도 되었다. 재수강을 한 치료학에서는 저번과 다르게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너무나도 험해 보이던 관문을 깔끔하게 통과해서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이 들었는지 매우 기뻤다. 그 사이 한국에 있는 오빠는 결혼식 날짜를 잡았는데 그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이 보통 골치 아팠던 게 아니었다.
2. 오빠의 결혼
오빠는 지방의 대기업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예전에 성서 모임에서 만나게 된 오빠의 전 여자 친구이자 현부인은 결혼하면서 서울 살이를 정리하고 오빠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신접살림을 차리기로 했다. 종교가 같아서 결혼 준비가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는 결혼은 여러 가지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오빠의 예비 처가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땅을 상속받고 재개발이 되면서 살림이 갑자기 넉넉해진 전형적인 벼락부자 집안이었다. 외제차와 명품백이 없는 우리 집과는 다르게 그 집은 외제차와 명품들로 대표되는 소위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집안인 것 같았다. 어느 날 오빠의 예비 처가에서 우리 집에 예단이 도착했다는데 그 금액이 커서 엄마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명품백을 비롯한 선물과 몇 천만 원 상당의 현금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런 예단을 받은 엄마는 당최 얼마를 사돈댁에 보내야 하는지가 참 고민이었다. 엄마는 고민고민하다가 예로부터 아들네 집은 반 정도를 처가에 돌려준다는 것을 어느 검색 사이트에서 보고 그렇게 준비하여 사돈댁에 보냈다. 그런데 오빠가 엄마에게 전화가 와서 “엄마, 지금 예비 장모님이 엄마가 보낸 예단받고 충격받으셔서 몸져누우셨어…” 하며 소식을 전했다. 충격에 빠진 엄마는 이 고민을 나에게 털어놓으셨는데 나는 미국에서 그 얘기를 듣고 며칠 동안을 고민하여 해결책을 엄마에게 제시했다.
그때의 상황을 차분히 복기해 보자면 엄마도 참 사려 깊지 못하시게 일처리를 하신 것 같다. 예비사돈의 입장에서는 똑같이 자식을 보내는 입장에서 우리 딸이 왜 더 돈을 적게 받는지, 우리를 무시하는 건지 별 생각이 다 들면서 화를 낼 만 하긴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이 상황들을 미국에서 들으면서 가장 실망한 것은 당사자 중 한 명인 오빠였다. 20년이 넘는 한 많은 결혼 생활을 드디어 마무리하려는 엄마의 어려운 결심을 기어코 바꾸게 한 오빠의 결혼인데 이런 식으로 결혼을 진행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 없도록 사전에 예비 신부와 함께 양가 부모님들의 예단 예상 금액을 물어보고 계획해야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처음 하는 결혼이니만큼 미리 생각하지 못했다고 치더라도 사돈댁에서 예단 금액이 맘에 들지 않아 몸져누웠다며 엄마에게 잘못했다는 식의 채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빠는 본인의 행복을 위해 불행한 관계를 끊어내고 새 출발을 하려는 엄마를 포기시키지 않았는가? 오빠의 미성숙함은 엄마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결혼하기도 전에 양가 사돈댁의 관계를 껄끄러운 사이로 만들고야 만 것이었다.
이 사태를 수습해 보고자 나는 급하게 예단이라는 문화를 찾아보았는데 예단이란 귀한 자식 보내주셔서 감사하고 우리 자식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선물을 교환하는 허례허식이었다. 사실 두 집안 다 쓰지 않아도 될 돈을 불필요하게 교환하는 것처럼 보였다. 속된 말로 돈지랄이라고 할까? 나는 엄마에게 사돈댁에서 보낸 선물들의 실제 금액을 찾아보고 보내신 현금의 대략적인 총액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오빠가 몇 달 전 취직 선물로 받았다는 명품 가방의 가격도 포함했다. 만약 아들네 집에서 집을 마련하였다면 사돈이 예단에 쓴 비용을 그대로 돌려주지 않아도 되지만 오빠의 경우는 달랐다. 나의 약대 학비를 감당하느라 집안 기둥이 뽑혀가고 있던 우리 집에서는 오빠에게 집을 해 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엄마의 적금을 깨서 겨우 새언니가 갖고 싶다는 티파니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는데 (무려 1캐럿!) 그 금액을 제외하고 나머지 금액만큼을 사돈댁에 추가로 선물해야 했다. 이미 예단으로 갔던 금액을 따져보니 대략 2천만 원 정도가 모자랐다. 그래서 엄마는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 금 가락지, 겨울 코트 한 벌과 나머지 금액을 봉투에 넣어 2차 예단을 사돈댁에 보냈다.
지금에 와서 오빠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오빠는 부모님이 나의 학비에만 크게 지출을 하면서 오빠에게는 큰돈을 쓰지 않아 서운했을 것 같기도 하다. 오빠는 대학교에 간 이후로 박사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께 손 한 번 벌려본 적 없었고 중간에 엄마가 캐나다로 잠시 떠났을 때 나를 버리고 간 느낌이 들면서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는 버려진 자식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들을 아무리 참작해 보아도 예단이 오가던 당시 오빠는 정말 얄미웠다. 마치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엄마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나는 꼭 저렇게 결혼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오빠에 대해 가진 얄미운 감정이 금세 미안함으로 바뀌는 사건이 오빠의 결혼식 참석 차 잠시 한국에 갔을 때 발생해 버렸다. 오빠의 결혼식이 끝나고 축의금을 정산하는데 아빠가 오빠에게 들어온 축의금을 써야겠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이유는 나의 학비를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둘의 바로 옆에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 나의 미국 유학은 우리 온 가족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나무였던 것이다. 이 날 이후 예단사건으로 생긴 불만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커진 나는 오빠에게 늘 빚진 신세가 된 것 같았고 언젠가 오빠한테 이 금액을 갚을 거라 다짐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결혼식 때 오빠에게 마침내 그 빚을 갚았다. 나의 결혼 이야기는 추후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저의 미국 유학은 온 가족의 팀워크가 필요했던 등산과도 같았던 것 같아요. 저는 미국에서 저대로 힘들었고 한국에서 가족들은 저의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어려운 희생들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얼른 졸업 후 가족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저의 다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다음 주도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