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국인 노동자 약사의 일상

by 티나

1. 내가 약사라고요?


부모님과 함께해서 너무 뿌듯했던 졸업식을 잘 마치고 학생 비자에서 OPT로 바꾸는 신청을 했다. OPT는 Optional Practical Training의 약자로 미국 대학에서 졸업한 유학생이 전공 관련 직장에서 최대 1년 (전공에 따라 길게는 2년) 동안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취업 프로그램이다. 한마디로 학생 비자에서 임시 취업 비자를 받는 과정이다. 비자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은 약대의 최종관문인 약사 국가고시를 공부해야만 했다. 취업이 확정되지 않은 미국인 동기들은 몇 달 본가에서 가족들과 쉬면서 여행도 하고 취업을 준비할 계획이었지만 미국인이 아닌 나는 재충전은커녕 미국에서 내 쫓겨나지 않기 위해 모든 걸 제 때 마쳐야만 했다.


이런저런 걱정들로 정신은 산만했지만, 다행히도 약사 국가고시를 합격했다. 그다음 단계는 약사법 시험이었다. 미국은 약사법이 크게 연방 정부의 약사법과 각 주의 약사법으로 나뉘는데, 50개의 각 주마다 약사법이 비슷한 부분도 많지만 다른 부분도 많다. 해당 주에서 약사 면허를 취득하려면 약사 국가고시 합격과 더불어 그 주의 약사법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법 시험은 헷갈리고 애매한 문제들이 많았다. 여러 개가 정답인 문제도 있고 하나가 정답인 문제도 있어서 매우 어려웠다. 아슬아슬하게 3점 차이로 합격을 하고 나서야 예정된 첫 출근을 위하여 다른 주로 이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기로 한 날짜가 얼마 안 남았음에도 나의 OPT가 승인이 아직 되지 않아서 (학교 측의 실수로 늦게 접수가 되는 바람에) 희망하던 스탭 약사 (근무 약사) 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감사하게도 회사에서 플로터 약사 자리가 있어서 OPT가 승인되면 플로터 약사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변경해 주었다. 플로터 약사는 보통 큰 체인 약국에서 휴가나 병가, 해고 등 여러 이유로 근무 약사가 부족할 경우 속된 말로 땜빵해 주는 자리다. 보통 한 지역 당 20개에서 50개 정도의 약국이 있어서 일하게 되는 약국이 매번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일을 하게 된 지역은 시골 동네여서 내가 사는 지역에서 짧게는 집에서 편도 15분, 길게는 편도 4시간까지 운전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OPT 가 예정보다 1달 정도 늦게 나왔지만 다행히도 나를 써준다는 회사에서 처음으로 일하게 되던 날, 내가 사는 곳에 위치한 가까운 스토어에 출근했다. 인턴이 아닌 약사로서 출근하게 되는 그날 정말 기분이 이상했다. 약사 면허를 따기는 땄는데 약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직원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약국의 총책임자인 약사로 내가 일할 자격이 되는가?… 내가 정말 이곳에서 돈 값이나 하게 될까?…



2. 미국 리테일 약국의 하루


내가 트레이닝받았던 미국 약국(현지에서는 리테일 약국이라 한다)의 하루는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이다. 하루에 약사는 2-3명, 약사보조원은 4-5명, 계산대 직원 2명이 교대한다. 하루에 처방전 수는 600개에서 700개 정도이다. 아빠에게 여쭤보니 한국 약국에서 처리하는 처방전 수는 하루에 50건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하루에 몇 백 개의 처방전을 처리하는 것이 말이 안 될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이 미국의 대형 약국 시스템이다. 오전부터 약국은 업무가 눈 코 뜰 새 없이 밀려들었다. 아침에 약국 문을 열자마자 마약성 진통제 처방전을 손에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길었고, 1분에 2-3통씩 오는 환자들의 전화들, 또 의료진의 전화들로 바빴다. 나는 약사로서 그 혼돈의 카오스에서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집중하여 처방전을 빠르고 정확하게 확인해야 했다. 더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처방된 약이 환자의 손에 닿기까지의 과정을 마지막 단락에 설명해 보았으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약국에서의 업무를 익히느라 트레이닝 2주가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10시간을 넘게 서있으니 다리가 부어서 일이 끝나면 똑바로 걸을 수가 없고 뒤뚱뒤뚱 걸어야 했지만 오랜 고난 끝에 마침내 내가 달러를 벌 수 있음에 감사하며 견딜 만했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하지만 그 행복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3. 플로터 약사로서의 생활


미국에서 오래 살았어도 장거리 운전은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이 직장에서 의도치 않게 스파르타식 실전 운전 훈련을 받게 된다. 2주씩 또는 한 달씩 나오는 스케줄을 미리 확인하고 이 날은 집에서 몇 시에 떠나야 약국 문 열기 15분 또는 20분 전에 도착할 수 있는지 시간을 계산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보통 내가 사는 곳과 2시간 이상 떨어진 스토어에서 일을 하는 날은 몇일씩 연속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근처 숙소를 예약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회사에서 운전한 시간과 숙소값은 잘 보상해 주지만 일이 손에 익지 않은 초보 약사에게 매 번 새로운 약국에서 일을 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처음 3달은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이 나름 재미있었고 내가 하는 복약 지도를 감사해하며 웃는 환자들을 보면 마냥 뿌듯했다. 그러나 3달이 지나고부터 허니문 단계에서 벗어났는지 콩깍지가 벗겨지며 스트레스가 시작되었다.


어떤 약국은 약국보조원들 간의 묘한 경쟁과 사내 정치가 있어서 잘못 입력된 처방전을 고치라고 한 직원에게 말하면 이건 쟤가 했다며 실수한 직원을 나무라기 바빴다. 나는 사내 정치는 딱 질색인 사람이라 그들의 경쟁에 개입하지 않으려 매우 노력했는데 그 때문에 잘못된 처방전을 보면 테크니션에게 다시 돌려보내느니 내가 직접 차라리 고치고 입을 꾹 닫고는 했다. 또 어떤 약국은 진상 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진상 환자들의 말도 안 되는 불평을 들어주는 척을 해야 했다. 그리고 약사 매니저가 공석인 어떤 약국은 약국 키를 받아 문을 열자마자 몇일씩 쌓인 밀린 처방 업무와 더불어서 여기저기 널브러진 여러 서류 업무들에 숨이 컥 막힐 지경이었다. 각각 약국마다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새로운 약국에 처음 출근하는 날이면 또 어떤 문제가 나를 괴롭힐까 가슴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나면서 긴장을 했다.


겨울이 되자 날씨도 험해져서 장거리 운전이 체력적으로 더 힘들어졌다. 내가 살던 지역은 눈보라가 심했던지라 그런 날에도 출근을 어김없이 해야만 했다. 사실 날씨가 험하면 배 째라면서 자체휴무를 하는 약사들도 더러 있었지만 약국이 필요한 사람들은 험한 날씨에도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책임감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몸이 아플 때도 꾸역꾸역 출근을 했다.


일이 고될 때마다 나에게 힘을 주었던 것은 이따금씩 만나는 좋은 동료들이었다. 특히 일도 잘하고 마음도 따뜻한 약사 선배들의 일하는 스타일을 보고 배우며 나도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힘을 주었던 것은 돈이었다. 2주에 한 번 달러가 들어오는 급여 계좌를 보면 뿌듯했다.


나는 그저 돈 때문에 모든 걸 참았다. 나와 오빠를 먹여 살리고자 나의 부모님도 이런 고된 하루들을 견뎌냈겠지. 나도 나의 부모님처럼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별책부록: 미국 약국 시스템>


첫 번째: 정보 입력 단계.


처방전을 약국 시스템에 입력하는 절차이다. 미국에서 처방전은 다양한 방법으로 약국에 전달된다. 환자가 직접 종이 처방전을 약국에 가져오기도 하고, 의료진이 팩스로 약국에 보내기도 하고, 전화로 약사에게 불러주기도 하고, 전자 시스템으로 보내기도 한다. 마약성 약물이나 향정신성 약물들은 미국 정부에서 규제하는데 해당 약물의 규제에 따라 처방전이 약국에 전달되는 방식들이 제한되기도 한다. 모르핀 같은 마약성 진통제의 경우에는 의사의 서명이 기입된 종이 처방전이나 전자 시스템만 사용해서 약국에 전달할 수 있다. 여러 방법으로 약국에 도착한 처방전들은 약국보조원이 약국 소프트웨어 시스템에 옮긴다. 이를테면 "처방 날짜 2025년 10월 30일, 환자 이름 홍길동, 환자 생년월일 2020년 3월 18일, 약 이름 가나다, 약 용량 500mg, 총수량 30알, 리필 가능 횟수 5, 용법 하루에 세 알씩 물과 함께 섭취하십시오.” 의 정보들을 타자로 입력하는 것이다. 처방전에 필요한 부분들이 빠져있으면 처방한 의료인에게 전화, 팩스, 또는 환자를 통하여 필요한 부분을 확인해야 한다.


두 번째: 보험 청구.


한국은 건강 보험과 처방전 보험이 국가에서 다 관리하는 시스템이지만, 미국은 민간보험이 대부분이라 각각의 시스템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복잡하다. 간단하게 말해 미국의 보험은 한 처방약의 값이 A라는 보험을 가진 환자와 B라는 보험을 가진 환자가 약국에 다른 값을 지불하게 될 수도 있다. 처방된 약이 보험에서 커버되고 환자가 약국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환자가 감당할 금액이면 간단하게 이 단계는 끝난다. 그렇지만 해당 처방전을 보험사에서 커버하지 않는 경우에는 환자가 전부 그 약값을 부담할지, 처방 의료인에게 다른 약으로 바꿔달라고 할지, 처방 의료인과 보험사가 소통하여 이 약을 커버하는 것을 여러 서류들로 논의하게 될지가 갈린다. 보통 이 과정에서 환자들은 많이 답답해한다.


세 번째 단계: 조제.


처방전에 나온 정보대로 똑같이 입력되어 보험사에 청구된 약을 해당 환자의 이름을 붙이고 조제하는 것이다. 혹시 약의 재고가 없을 경우 약국에서 주문하여 다음 날에 조제하게 된다.


네 번째 단계: 약사의 최종 검수.


약사는 처방 의료인이 해당 환자에게 처방한 처방전의 정보들이 약국 시스템에 정확하게 입력되었는지 확인한다. 원칙상으로는 주어진 처방전대로만 조제해야 하지만 약사법에서는 약사가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처방전을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이를테면 처방 의료인이 처방한 연고는 15g이었는데 시중에 나와있는 약 중에 15g은 없고 가장 작은 사이즈가 28g이라면 약사의 판단으로 간단히 그 약을 선택한 이유를 기록하고 최종 체크한다. 이 단계에서 또한 약사는 의약품 사용 검토를 한다. 영어로는 drug utilization review라고 불리는 이 절차는 처방 의료인이 처방한 의약품이 환자의 안전을 고려했을 때 적절한 선택인지 판단하는 절차이다. 같은 성분의 약을 해당 환자가 이미 먹고 있다거나 환자가 먹는 다른 약물을 함께 복용하면 안 되는 약인 경우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약사의 판단으로 해당 처방 약물을 환자가 먹으면 안 될 경우에는 처방 의료인과 상의 절차를 거쳐 다른 약으로 바꾸기도 한다.


마지막 단계: 계산과 복약 지도.


환자가 본인부담금을 계산하면 드디어 환자에게 약이 전해지게 된다. 환자에게 약 복용 상담을 받을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 법이어서 환자가 상담을 원하면 약사가 환자와 상담을 하는데 짧게는 1분, 길게는 10분 정도까지 걸린다. 약사는 환자에게 공유했던 내용들을 차트에 남겨놓는다.





저는 20년 넘게 학생의 신분으로 살다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을 시작하게 되니 배울 것이 천지였습니다. 학교에서 보고 배운 것, 인턴으로 경험한 것, 그리고 상상으로 생각하던 약사로서의 하루가 실제 제가 겪었던 하루와는 좀 달랐거든요. 더 이상 물어볼 선배 약사도 없고 혼자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제가 약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혼자 수많은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들과 그 결정들로 태도가 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장거리 운전과 자주 점심을 거르고 10시간씩 일해야 하는 근무 환경이 저의 체력을 바닥나게 하고 있었어요. 남의 돈은 쉽게 벌 수 없다는 말을 뼈저리게 체감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다음 연재는 어느 휴양지 시골 마을에서 약국 매니저로 승진하면서 겪은 일들을 소개할게요. 이번 주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18화가까워져 오는 졸업, 그리고 외노자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