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하실 생활
1. 스탭 약사? 약국 매니저? 나는 어떤 직장을 선택해야 할까?
8개월 정도 플로터 약사로 일하던 중에 영주권 스폰서가 필요한 나의 사정을 아는 상사에게 연락이 왔다. 마침 OPT 비자는 1년 기한이라 거의 만기가 되어가고 있어서 취업 비자 (H1B)로 바꾸어야 하는 시점이었다. 보통 영주권 진행은 취업 비자 진행보다 더 느린 편이라서 미국 회사 측에서는 보통 취업 비자를 먼저 진행한다. 그런데 이민법 상 근무지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조항이 있어서 플로터 약사로는 취업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당시 내가 일하는 지역에서 약사를 채용하는 근무지는 두 곳이었다. 첫 번째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지역의 스태프 약사 자리였다. 이미 여러 번 그 약국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나름 익숙한 약국이긴 하였으나 그리 안전하지는 않은 곳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혼자 약국을 닫을 때마다 매장 내 다른 부서의 직원이 위험한 일이 없는지 항상 지켜봤겠는가? 두 번째 자리는 내가 사는 곳에서 50분 떨어져 있는 휴양지 호수 마을의 약국 매니저 자리였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호숫가라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여러 번 일한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약국에 오는 환자들도 수상한 사람들이 적은 편이고 안전한 동네라서 이 두 번째 직장에 끌렸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매니저라는 직책이었다. 한 약국 지점의 총책임자인 약국 매니저는 약국 재고 관리, 여러 법적 문서 정리와 보관, 직원 관리와 더불어서 본사에서 내려지는 모든 지시 사항들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책임지는 역할이다. 플로터 약사 시절 때부터 선배 약사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공통적인 얘기는 매니저는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봉급을 좀 더 주기는 하는데 업무량이 상당히 많아져서 쉬는 날에까지 약국 업무를 처리해야 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리는지라 고생이 심하다고 하였다.
첫 번째 직장은 직책이 스탭 약사인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지만 주변 환경이 꽤나 위험했고 두 번째 직장은 안전한 곳이라 마음에 들었지만 매니저라는 짐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상사에게 일주일 동안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가 없었을까?
2. 햇병아리 약국 매니저 티나
제목에 이미 스포가 되었지만 결국 나는 약국 매니저 직책을 선택했는데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취업 비자부터 영주권까지 진행이 되려면 미국 약사들이 지원하고 싶지 않을 위치나 직책이어야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민법 상 영주권을 진행하려면 먼저 미국인이 고용이 안 되는 포지션인지 확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때 회사에서는 공개구인광고를 내서 미국인들이 지원하지 않아야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대도시에서 4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의 약국 매니저는 쉽게 지원할 수 있는 직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주권 진행에는 더 유리한 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이 판단은 옳은 판단이었다. 나와 같은 회사의 다른 한국인 약사는 스탭 약사여서 공개구인광고를 내자마자 미국 국적의 다른 지원자가 본인의 포지션을 지원해 버려서 영주권의 첫 단계부터 한참 진행이 안되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별문제 없이 영주권이 진행되어서 이 직장에서 4년 반 만에 무사히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 4년 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그 어떤 때보다 고통스러웠던 시간이었다. 한참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하려니 심장 근육 한 부분이 찌릿찌릿하는 것 같고 머리가 아파오지만, 이 절망적이었던 시절이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형으로 끝맺음이 난 것에 감사하며 조심히 이야기를 풀어본다.
3. 낮에는 동네북이 된 나, 밤에는 서류더미에 깔린 나
결국 1주일에 공식 근무시간이 40시간인 약국 매니저 역할로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는데 선배들의 말대로 약국 매니저로서의 업무량은 대단했다. 하지만 약국 시스템 상 공식 근무시간 안에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매주 40시간을 넘어서 50시간-60시간까지도 일을 하기 일쑤였다. 근무 시간 외에 내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전근대적인 약국의 문서 보관 체계였다.
전에 있던 매니저는 70대의 약사였고 지난 20년 넘게 이 약국의 총책임자였는데 정리와는 담을 쌓으신 분이었던 것 같다. 각종 문서들은 뒤죽박죽 정리되어 있어서 찾아보기 매우 힘들었고,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인 재고 관련 문서들에 누렇게 변색된 10년 넘은 종이들까지 섞여 있었는데 심지어 보관 상태도 불량했다. 그렇기에 기존의 문서를 찾아보려면 그야말로 문서발굴을 하는 고고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내 성격 상 이 혼돈의 카오스에서 일을 진행하면 정신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처음 몇 달 동안은 비번인 날에도 매번 출근해 약국 뒤편에서 문서를 새로 정리했다. 박스에 보관해야 하는 문서들은 박스로 옮기고 상태가 안 좋은 문서 파일들은 새것으로 바꾸고 라벨링도 새로 하면서 천천히 정리해 나갔다. 한 3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책장의 약국의 문서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었고, 그러고 1년이 지나서야 약국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여러 자료들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플로터 약사로서 여러 약국에서 문서를 찾아본 경험이 있어서 어떻게 문서들을 정리해야 보기 쉬운지 이미 보고 배운 것들이 있던 덕택이었다.
약국의 문서 보관 체계는 그렇다 치고 가장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성수기인 여름휴가 기간이었는데 미국 각지에서 방문한 여행객들이 약을 분실하거나 다쳐서 급히 약국에 처방전 트랜스퍼를 요청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한국은 어떤 지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용 약들은 의사에게 방문할 필요 없이 제한된 기간 동안은 약국에서 리필이 된다. 이 처방전은 환자의 동의만 있다면 미국 내 어떤 약국에서도 남은 처방전을 옮길 수 있는 트랜스퍼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내가 당뇨병 환자여서 인슐린을 A 약국에서 처방받고 있는데 휴가 때 인슐린을 깜박하고 안 가져왔다면 남은 리필 횟수가 충분하다는 전제 하에 머물고 있는 가까운 B 약국에 연락해서 처방전을 A약국에서 B약국으로 옮길 수 있다.
트랜스퍼 관련 전화는 기본 10분 이상이 걸리는데 먼저 환자의 인적사항을 기입하고 원래 처방전이 있는 약국에 전화를 걸어서 트랜스퍼를 요청하면 팩스 또는 전화상으로 처방전의 정보들을 약사로부터 전달받는다. 그 처방전은 새 처방전과 같이 다섯 가지 과정(지난 연재를 참고 바랍니다)을 동일하게 거쳐 처방전이 우리 약국에 옮겨지게 된다. 보통 보험에서는 처방전이 중간에 트랜스퍼가 되면 보험처리를 해주는 경우가 드물어서 환자가 비용을 고스란히 내야 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이런 경우를 최소화하기 위해 보험사에 전화를 해서 예외사항이 있는지 체크를 하기도 한다. 처방전 하나를 트랜스퍼하기 위한 이 지난한 과정들을 환자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미 언급했듯 호수가 있는 휴양지라 여기서 물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다쳐서 긴급처방전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도 많았다. 물론 환자들의 답답함은 알지만 어떤 환자들은 양해를 구해도 다짜고짜 화를 내기도 하고 본사에 민원을 넣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도 했다. 아직 어리바리한 신입이었던 나는 어찌 대처할지 몰라 당황했지만 그다음 해부터는 나도 이런 업무환경과 이를 방기 하는 무책임한 회사에 화가 나고 독기가 생겨서 제발 회사에 민원을 넣어달라고 환자들에게 애걸복걸하기도 했다. 간혹 어떤 환자들은 내가 일하는 환경이 너무 말도 안 된다고 본사에서 인력을 더 충원해야 맞지 않냐며 민원을 넣었지만 본사에서는 귓등으로도 흘려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추가적인 증원은 내가 퇴사할 때까지 없었고 인력이 부족한 부분은 매니저인 나 또는 스탭 약사 혼자서 약국을 보면서 채워야만 했다.
몸은 하나인데 온갖 전화도 받아야지, 약값 계산도 해줘야지, 어제 주문한 약들의 재고도 정리해야지, 처방전을 처리해야 하는 업무까지 쌓이면서 그야말로 멀티태스킹의 극한이 펼쳐졌고 이 모든 일들을 약국이 문 닫는 시간까지 다 끝내려고 해도 끝낼 수가 없는… 일에 깔려 죽는 날들이 많아졌다. 10시간 넘게 화장실도 못 가며 여러 환자들을 상대했고 약국 문을 닫으면 남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2-3시간씩 꼬박 남아야 했기에 앉아있거나 점심을 먹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매일 처방전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애걸복걸하여 내일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 처방전을 그대로 두고 간단 말인가? 잠을 줄이고 근무시간을 늘려서라도 약속한 처방전 업무는 그날에 꼭 마쳤다. 비록 회사나 환자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최소한의 약사로서의 도리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내 능력이 다 닿지 않는 것들도 초인적으로 다 잘 해내고 싶었던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완벽주의와 책임감에 가려진 내 너덜너덜한 마음과 지친 신체가 암 덩어리를 빚어내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4년 8개월 동안의 영주권노예 생활을 회고하며 글을 쓰자니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다시 되새김질하는 느낌이어서 몸의 아주 작은 세포 까지에까지 각인된 이 아픈 시간들을 글로 쓰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그 시간들을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증거겠지요. 고통스러운 시간들은 언젠가 지나간다고 모두가 말합니다. 우리 모두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다양한 이유가 있고 저의 경우는 영주권이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특히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우리의 몸이나 마음에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면 말이죠. 다음 연재에도 고난의 연속이었던 약국근무생활로 인해 가을낙엽처럼 시들어가는 저의 청춘에 대해 좀 더 고백하려 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