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대 3,4년 차
재수강을 한 치료학 1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 겨울 방학 때 오빠의 결혼식에도 다녀온 나는 드디어 약대 3년 차가 되었다. 3학년때는 학업도 어려워지는 건 물론이었지만 4학년 때 1년 동안 이수해야 할 실습과를 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한국에서 반 학기를 휴학하고 난 후 나는 좀 어려워진 학업도 잘해나갔다. 3학년 때는 정말 외울 것들이 너무 많고 시험도 많아서 아마 내 평생 본시험 수만큼을 약대 3학년 때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특히 치료학 2, 3, 4 과목들은 너무 어려웠다. 외우는 것은 자신 있는데 암기뿐 아니라 응용력이 필요로 하는 치료학을 공부하다 보면 정말이지 머리 근육에 쥐가 나고 뇌가 쪼그라드는 느낌마저 들었다.
학업도 어려웠지만 그보다 취업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외국인으로서 학생 신분을 청산하고 미국에서 영주권을 받으려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취직을 해야 하는지 열심히 조사했다. 졸업하고 취직한 선배들을 보며 나도 넓디넓은 미국 어딘가에 일하게 된다면 나도 부모님도 참 뿌듯할 거라 생각했다. 내가 이 나라에서 쓴 달러만큼 벌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야만 우리 가족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3학년 때 학교에서 보는 마지막 시험을 치른 후, 나와 동기들은 매우 홀가분했다. 4학년 실습도 무사히 마쳐서 졸업도 해야 하고 국가고시까지 합격을 해야 약사가 되는 것이었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보게 될 필기시험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니 너무 기뻤다. 한편으로는 취업에 대한 불안감과 걱정이 엄습해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4학년에는 1년 내내 교내강의는 없고 여러 병원, 클리닉, 학교, 약국들에서 총 8 종류의 실습을 했다. 여러 교수님들과 더 가까이 지내면서 환자들 케이스를 함께 공부하며 미국에서 약사로 어떤 일상들을 보내게 될지 상상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교수님 두 분을 소개하고 싶다.
2. 인상 깊은 교수님들
내가 가장 존경하는 감염병 전문 약사 교수님은 여러 선배들로부터 아주 까다롭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감염과 수업을 담당하실 때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을 매우 잘하시는 교수님인데 시험은 좀 어려웠고 어떤 날은 수업에 학생들이 너무 오지 않아서 갑자기 깜짝 퀴즈를 치르기도 했다.
나는 예전부터 감염과가 좋았다. 다른 분야와 조금 다르게 적절한 항생제를 처방하면 짧은 시간 내에 중증 환자들이 급격하게 건강해지는 기적과도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 감염을 일으킨 병균을 찾아서 항생제를 처방하는 게 마치 증거를 모아 범인을 잡는 형사나 검사가 된 느낌이랄까? 어떤 감염이 지금 이 환자의 상태에 이르게 했는가를 관찰하다가 항생제를 잘 선택하면 ‘딩동댕!’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물론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케이스도 많긴 하지만, 정답이 애매모호한 학문보다 명확한 학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감염과가 매우 매력적이었다. 교수님이 아무리 까다롭기로소야 열심히 하는 학생한테까지 까다롭게 하실까 생각하며 이 교수님과의 실습을 신청했고 당연히 경쟁 학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가 매칭이 되었다.
이 교수님은 말씀이 많이 없으신 분이신데 매일 아침 출근하시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 4학년 실습 학생들과 회의를 하신다. 말이 회의지 사실은 학생들이 잘 공부하고 이해하고 있는지를 체크하고 더 공부가 필요한 부분을 짚어주는 시간이었다. 나와 함께 실습을 한 동기와 나는 매일 아침 이 시간이 조금 긴장되었다. 질문에 답을 못하면 무안을 주시거나 인격적으로 모독을 주시거나 하시는 분도 아니었고 언성이 크게 높아지는 분도 아니셨지만 그분의 무뚝뚝함에 카리스마가 느껴져서 초반에는 조금 무서웠다. 교수님이 출근하시기 1시간 전에 미리 가서 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동료 의대생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며 매일 아침 감염과 의사와 감염과 약사 그리고 의대생들과 약대생들이 모두 라운딩에 대비했다.
다행히 열심히 한 나의 노력을 봐주시기 시작하며 마침내 내가 처음으로 A학점을 받은 학생이라며 수고했다고 말씀해 주시면서 어떤 약사가 되고 싶은지 물어보셨다. 이 교수님은 내가 실습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임상적인 전문 약사의 목표를 가지고 좋은 추천서를 받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가족들 모두 나의 유학 때문에 오랜 시간 많이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내가 하루라도 빨리 약사가 되어 돈을 버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으며 미국에서 나는 학생 비자 신분이니 영주권 스폰서가 가능한 체인 약국에 취직을 하는 것이 가장 가능한 취업 방향 같다고 말씀드렸다. 4학년 실습을 내가 좀 더 임상적이고 전문적인 과로 정한 것은, 내가 약사가 되면 리테일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임상적이고 전문적인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현실적으로 일할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분야들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 감염과를 선택했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본인의 가족 이야기를 공유하시면서 마취과 의사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해 본인 역시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교수님의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가 아닌 약사가 된다는 것이 매우 싫으셨다고 했다. 마취과 의사로 넉넉한 형편에도 아들의 대학 생활에 금전적인 도움은 한 푼도 주지 않으셨으며, 교수님의 어머니에게 많이 상처도 줬다고 했다. 그 때문에 교수님은 약대를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장 저렴하고 큰 빵을 하나 사서 하루 세끼를 그 빵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고 하셨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지금까지 오신 교수님이 대단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해주신 말은 약 관련 논문을 매일 읽으라는 것이었다. 사실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교수님의 말씀을 지킨 적이 많이 없기는 하지만 아직도 종종 안부를 물으며 소통하고 있다. 내가 암 진단을 받고 치료에 전념하며 커리어를 중단했을 시기, 나의 자존감이 바닥이 난 그 시기에 이 교수님과 이메일을 짧게 주고받으며 위로를 받았다.
소아 전문과 약사 교수님은 수업에 매일 1분에서 10분씩 늦게 오시는 분이었다. 매일 헐레벌떡 오셨는데 수업은 재미있고 잘 가르치긴 하셨지만 시간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나는 이 교수님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아과를 선택한 것은 나중에 내가 혹시 엄마가 되면 도움이 될 지식들을 많이 배우게 될 것 같아서였다.
신생아 집중 케어실에 처음 가던 날, 응애응애 소리로 시끄러울 것 같은 신생아실은 고요했다. 대부분 이곳에 있던 아이들은 미숙아로 정말 내 손 보다 작은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은 몸짓도 울음소리도 작았다. 특히 울트라맨처럼 양 눈을 가리고 집중 블루 라이트 치료를 받는 아이들을 볼 때면 너무 안쓰러워서 눈물이 맺힐 것 같다가 또 그 작은 손과 발이 너무 귀엽기도 하여 미소가 나왔다. 소아과의 매일 아침 라운딩은 아이들을 돌아다니면서 체크하지 않고 큰 회의실에서 의대 교수, 약대 교수, 의대생, 약대생, 그리고 간호사들 모두 모여서 회의를 했다. 정말이지 다양한 배경의 관점들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었다. 각 분야에서 최선으로 생각하는 치료옵션들을 토론하며 환자를 낫게 하는 것이 이 모든 회의의 목적이었다. 의료진으로서 약사의 역할이 이렇게 존중받는 환경이 되기까지 이끄셨던 소아 전문과 약사 교수님이 대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교수님은 중학생 1명, 고등학생 1명의 자녀가 있는데 매일 아침 출근 전 아이들의 학교를 데려다주고 오신다고 했다. 그래서 가끔 학교에 늦게 오게 되는데 특히 아침 일찍 수업이 있으면 학생들한테 많이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프로페셔널한 자세는 아니긴 하지만 이 분은 모든 일상이 가족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점점 알게 되었다. 본인은 조교수로 10년 넘게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데 정교수가 되려면 여러 논문과 자격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유한한 가족과의 시간, 특히 자식들과의 소중한 시간이 더 귀하고 아까워서 커리어에는 더 할애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자식들과의 시간이라… 이렇게 가족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엄마가 있는 교수님의 아이들이 참 부럽게 느꼈다. 나는 어떤 약사가 될까?
3. 졸업과 취업
4학년 마지막 실습을 앞두고 있을 무렵 두 군데 체인 약국회사들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영주권이 필요한 지원자들은 이미 지원을 할 때 영주권 스폰서가 필요하다고 기재하기 때문에 사실 인터뷰까지 이어지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다행히 두 군데에서 연락이 와서 놀랍고 기뻤다. 실습이 끝나고 차에서 전화 인터뷰를 하는데 너무 가슴이 떨리고 쿵쾅거려서 귀에서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학교에서 인터뷰 연습을 몇 번 했었는데 실제 인터뷰는 정말 달랐지만 인터뷰 질문들은 전형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터뷰를 무사히 잘 마치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 사이 마지막 실습이 끝났고 졸업식까지 한 달여의 시간이 있었다. 많은 동기들은 학교 도서관에서 모여 국가고시 시험을 공부하기도 하고 졸업 전 우정 여행, 가족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부모님 두 분 다 졸업식에 참석하기로 하셔서 매우 행복한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공항에 부모님을 마중 나갔는데 아빠의 모습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한쪽 뺨은 부어있고 한쪽 눈은 반쯤 감겨있는 얼굴이셨다. 몇 개월 전에 안면마비 (소위 구안와사)가 오셔서 눈은 한쪽이 반쯤 감겨있던 것이었고 거기에 며칠 전 치아감염으로 인해 치아를 뽑고 임플란트를 하셔서 한쪽 뺨이 부어있는 것이었다. 엄마는 말씀하시길 “너네 아빠가 비행기 안에서 잇몸에 피가 철철 나와서 승무원한테 얼음주머니 가져달라고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라고 하셨다. 아빠의 건강 상태는 엄마의 말씀으로도, 내가 직접 보기에도 미국 여행을 오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 보였다. 몇 년간 어렵게 미국 유학 학비를 마련하여 보낸 성과를 축하할 수 있는 딸의 약대 졸업식을 아빠는 어떻게 서든 꼭 참석하시고 싶었던 것 같다.
졸업식 2주 전쯤 미리 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학교를 구경시켜 드렸다. 아빠의 치아 상태 때문에 예약해 놓은 스테이크 하우스는 갈 수 없었고 아빠가 드실 수 있는 매 끼를 엄마가 요리하셔야 했으며, 엄마와 아빠의 사이는 여전히 티격태격 불편한 공기가 가득했지만, 나의 졸업식을 앞둔 우리 가족은 행복했다. 졸업식이 더 기쁘게 느껴진 것은 졸업식 며칠 전에 한 체인 약국에서 취직 합격증을 이메일로 받았던 덕분일 것이다.
고용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스캔해서 보내는데 어찌나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는지 모르겠다. 와! 나 이제 미국에서 달러를 벌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약대를 졸업하던 날, 지난 10년간 캐나다와 미국에서 저의 유학 생활이 끝이 나게 되었음에 뿌듯했습니다. 사이는 좋지 않으신 부모님이지만 딸의 약대 졸업식에 함께 참석하여 주신 저희 부모님이 참 기뻐 보이셨어요. 더군다나 취직도 하게 되어 경제적으로 독립도 하게 되니 저의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달러를 드디어 벌게 된 저의 사회생활은 어땠을까요? 다음 주도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