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이 장애 상담
내가 상담을 다닌 상담소는 식이 장애를 전문으로 상담하는 곳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기 몇 달 전부터 이 상담소를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이 고통스러운 병을 빨리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서 한국에 오자마자 상담 예약부터 했다. 섭식 장애는 대표적으로 거식증 (신경성 식욕부진증)과 폭식증 (신경성 대식증)이 있는데, 나의 경우는 폭식증으로, 짧은 시간 안에 지나치게 많은 음식을 섭취한 후, 체중 증가를 방지하기 위해서 구토, 이뇨제나 설사제와 같은 약물 사용, 과도한 운동 등의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상태이다. 상담소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20대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며 어둡고 우울한 표정이었다.
나는 왜 내가 섭식 장애가 생겼는지 매우 궁금했다. 어쩌다 나에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병이 생긴 걸까?
몇 달간의 상담동안 나의 성격, 성향을 비롯하여 나의 가족들과 주변인들에 대하여 정신과 의사와 임상 심리상담사에게 털어놓았다. 상담의 내용들을 모두 다 공유할 수는 없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내가 몰랐던 나에 대하여 공유하고자 한다.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언급할 때 잠깐 나의 슬픈 어린 시절을 공유했었지만, 나는 가족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던 여린 아이였다. 일하느라 바쁘셨던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하여 나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외할머니가 밥을 차려주시면 상 위의 음식은 남김없이 다 먹어야 했다. 나는 외할머니에게 욕과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배가 불러도 꾸역꾸역 다 먹고는 했다. 게다가 어릴 적에는 몸이 마르고 약해서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외할머니는 나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녹용을 달여오셨다. 그 때문인지 식욕이 늘어났고 외할머니가 차려준 그 많은 밥을 다 먹고도 간식까지 끝내게 되니 살이 찌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식사량이 수직상승하니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방학 동안에만 무려 9센티미터가 자랐고, 감기가 덜 걸리는 튼튼한 어린이가 되었지만, 옆으로 성장을 하면서 결국
과체중이 되어버렸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부터는 학업에 전념하게 되어서, 일상에서 몸을 움직이는 일은 더 줄어들었고, 학업 스트레스에 달달한 군것질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키는 158센티미터인데, 몸무게가 60킬로를 넘어서 70킬로를 넘보고 있게 되어버렸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나의 몸은 그보다도 더 비만해지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엄마와 칼국수 집에 갔는데, 옆 테이블에서 드시고 계시던 노부부가 “아유! 어떻게 엄마보다 저렇게 뚱뚱해? 저 학생은 살 좀 빼야겠는데!” 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빨개져서 맛있게 잘 먹고 있던 칼국수를 그만 먹고 일어나 나왔던 기억이 난다. ‘내가 대학만 가면! 살 빼고 늘씬해지리라!’ 굳게 마음먹으며, 나의 비만한 모습은 내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외면하며 지냈다. 그러다 유학을 결심하게 된 후,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은 싫어하는데 살은 빨리 빼고 싶었던 나는 단기간에 살을 뺄 수 있다는 여러 광고들에 혹했다. 그러다 한의원에 방문하여 식욕 억제를 해준다는 한약을 먹고, 지방분해주사를 맞으며, 필요 영양소가 부족한 불균형하고 초저칼로리인 식사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유학을 준비하는 3개월 만에 10킬로가 넘게 감량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건강하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아주 불안한 다이어트였다.
캐나다로 유학을 가고 난 후, 엄마 덕분에 균형 잡힌 한식 식사를 하며 부족했던 영양이 채워졌고 머리숱이 다시 자라남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몸무게가 느는 것에 극도의 혐오심이 생기게 되어서 조금만 몸무게가 늘면 먹는 양을 줄이고는 했다. 그렇게 나는 절식과 영양실조로 줄어든 몸무게를 보면 기분 좋아했다. 그것이 근육량과 기초대사량을 저하시켜 나의 건강을 크게 해치는 건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미국 대학교에서 혼자 지내게 되자, 학업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마다 억누르고 있던 식욕이 종종 터져버렸다. 게다가 함께 식사하는 가족이 없으니 비정상적인 식이 습관을 지적해 줄 사람 역시 없게 되었고, 이는 폭식증이 잉태되기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2. 불안과 강박사이
한 마디로 나의 폭식증은,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외모를 이루기 위한 강박과 그 왜곡된 아름다움을 구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과연 이 완벽주의는 내가 자란 환경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일까?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상담을 하며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심연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가 자라온 가정이 특이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초등학교 4학년쯤, 친한 친구네 집에 갔었는데 마침 그날이 친구 어머님의 생신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친구 아버님이 빨간 장미 꽃다발을 보내셨는데, 꽃다발에 예쁜 카드도 꽂혀있었다. 친구 어머니는 그 카드를 읽으시고 흥얼거리시며 예쁜 꽃다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셨다. 친구는 자기 부모님 사이를 보면 닭살 돋는 못 말리는 부모님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친구에게는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었지만 내게는 그야말로 컬처쇼크 그 자체였다. ‘세상에…. 이렇게 사이좋은 부모님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어?’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엄마와 아빠는 단 한 번도 다정해 보이신 적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견실한 맞벌이 부부에 말썽 피우지 않는 아들과 딸, 그리고 다른 가족들처럼 가끔 여행도 다니던 평범한 가정, 마치 톱니가 잘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애정이라는 윤활유가 부재한 그 무엇보다 위태로운 상태였던 것이 우리 가정이었다. 각자의 역할은 나름 잘 해냈지만 서로를 다독이고 아껴주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된 직장생활과 시댁과의 관계에 지쳐 외할머니와 함께 내 앞에서 아빠 흉을 보고 가끔 쏘아붙이듯 부부싸움을 시작하는 엄마, 내게 따스한 말을 자주 해주셨지만 엄마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항상 회피하며 본인의 월급을 본가에 모두 드렸던 효자 아빠, 나를 항상 못마땅하다는 듯이 보며 폭행 역시 일삼았던 5살 많은 오빠, 이것이 평범해 보이는 우리 가족의 실상이었다.
우리 가족의 일상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주중에는 3교대를 마친 후 집에 온 엄마는 외할머니와 함께 직장에서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아빠 흉을 자주 보셨고, 아빠는 아빠를 싫어하는 외할머니를 피하셨다. 엄마가 퇴근하기 전에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오시면, 외할머니는 아빠, 오빠, 나의 저녁을 거실에 차려주시고 방으로 들어가서 따로 저녁을 드셨다. 주말에는 아빠가 오빠와 나를 데리고 등산을 가기도 했지만 엄마가 함께인 적은 없었다. 엄마와 같이 보낸 주말을 생각해 보면 아빠 역시 함께인 적도 없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의 보통의 주말은 성당을 가셨다가 장을 봐오시는 엄마와, 그 엄마가 차려주신 식사를 드시고 스포츠 프로를 보다가 낮잠을 주무시는 아빠,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무섭게 나를 자주 때렸던 오빠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마주 볼 일이 줄어든 그런 날들이었다. 심지어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여름휴가 5일을 제외하고는 넷이서 함께 일상을 보낸 기억이… 가끔 외식할 때 빼고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특이하고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친구 아버지의 꽃다발을 보게 된 이후 다른 가정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유심히 다른 가정들을 관찰한 이후, 우리 집은 비정상적인 가족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을 먹게 된 네오와 같은 기분이랄까… 비록 행복이 어떤 감정인지 몰랐지만, 다른 집들과 비교하게 되니 나는 우리 가족이 매우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어느 추석 명절에는 큰 외삼촌네 댁에서 다 같이 가족 모임을 가졌는데, 엄마가 아빠에게 비꼬며 가시 돋친 말을 쏘아붙였고 그 말을 들은 아빠는 외가 식구들이 있는 앞에서 엄마에게 “그러면 이혼해!”라고 큰 소리를 내셨다. 그때가 내 나이 12살 정도였던 것 같다. 마음이 여리고 예민했던 성향의 나는 화목하지 않은 부모님의 사이를 느낄 때마다 불안해졌다. 두 분이 헤어지면 나는 어쩌나 하는 불안보다도, 두 분 중 한 분이 어느 날 마음이 아파서 돌아가시면 어쩌나 생각했고, 언젠가 두 분이 헤어지셔야 우리 가족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며 언제 그 결정이 내려져서 나의 일상이 홀가분해질까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이 들 때마다 나의 불안함이 솟구치면서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 깨어 엄마 아빠의 코 밑에 손을 대보고는 하였다. 엄마, 아빠가 내 곁에 있는 것이 좋으면서도, 화목하지 않은 부모님인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가 내 옆에 살아있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자꾸 확인하려고 했던 마음에서 코 밑에 손을 대보는 등의 반복적인 행동을 했던 것 같다.
나의 이런 불안 강박적인 성향은 유학을 가면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기자 그 목표에 도달하려 노력하는 와중 종종 심해지고는 하였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나의 불안과 강박을 잠재워주는, 어릴 때부터 함께한 시간이 늘 부족하다고 여긴 보고 싶은 엄마와 함께여서 괜찮았지만, 내가 미국 대학교에서 혼자 지내면서부터는 불안과 강박이 엄습해 올 때마다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3. 식이 장애 덕분에
나의 마음 상태가 나아지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상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나의 비밀스러운 고민과 콤플렉스를 털어놓은 것이 부끄럽지만 후련하기도 했고, 때로는 마음이 정말 나아지고 있는 것인지 수치로 알 수 있는 법이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였다. 가끔은 귀찮은 마음도 생기고 돈이 아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어느새 상담을 받은 지 6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평생 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다가 털어놓기 시작하니 몰랐던 나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몰랐던 나를 형성시킨 우리 부모님이나 나의 가족들의 모습에 대해서도… 이게 다 식이 장애 덕분이다.
저에게 식이 장애는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이 많은 시기에 불청객처럼 찾아왔습니다. 그 시기에는 식이 장애 때문에 가던 길을 갈 수 없는 지경까지 마음이 힘들어진 제 신세가 정말 억울했어요. 하지만 지금 그때를 생각해 보니, ‘식이 장애 덕분에’라는 생각이 들어요. 식이 장애를 치료하는 동안 몰랐던 것들을 배우게 된 것들이 참 많은 것 같거든요. 이 정도면 식이 장애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까 봐요. 다음화에서는 꺼내기 힘든 저의 가족 이야기를 더 깊게 풀어보려 합니다. 이번 주도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