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미국으로…
행복했던 한국에서의 여름 방학을 마치고 나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로써 2학년이 시작되었다. 3개월간의 여름 방학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폭식증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하면 왠지 모를 긴장감이 나를 불편하게 하였다. 내가 어릴 때보다 더 사이가 안 좋아지신 나의 부모님은 서로 대화가 더 없어졌다. 내가 한국에 있을 동안에 나는 둘 사이의 대화 메신저였다. “엄마, 아빠가 이렇게 말했어,” 또는 “아빠, 엄마는 이렇게 할 거래.” 이런 말들을 내가 전하고 있었다. 더 악화되는 두 분의 사이가 안타깝기도, 답답하기도 했다. 지난여름동안 나는 두 분의 부부 상담을 적극적으로 여러 번 권하기도 했지만, 아빠가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미국에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자, 학기가 시작되면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는 한편, 한국을 떠나는 것이 참 후련하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 아빠 사이의 긴장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
2학년에는 약학 전문대학원 입학 원서 접수를 곧 해야 하고 인터뷰 준비도 해야 한다. 할 일은 많은데, 학업은 1학년보다 훨씬 버거워졌다. 일단 큰 문제는 나의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 추억도 잘 만드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런 상태인지 내 인생이 자꾸 비교가 되었다. 인생을 누구보다 멋지게 살아내고 싶은 욕심이 커서,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는 부분들을 보지 못하고, 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집중하여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었다. 나의 자존감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2. 모태솔로라도 연애가 하고 싶어
부디 이 불안함이 수그러들 수 있도록 기도를 간절히 하였지만, 불안함은 점점 더 커지는 느낌이었다. 매주 미사 후, 성당 청년회에서 함께 주말을 보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차가 없었던 나는 미사를 갈 때 근처에 사는 차 있는 선배들의 라이드를 받았는데, 한 선배가 어느 날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한 선배한테 내가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고백을 하였다. 이미 군대도 다녀오고 졸업이 1년 남았던 그 오빠는 뜬금없는 나의 고백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나에게 말해주며 거절을 했다. 그 선배한테 거절의 대답을 듣고 1달 뒤쯤, 또 다른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무심한 듯 나를 챙겨주는 모습들이 좋았고, 유머를 섞어해 주는 진솔한 말들에서 성숙함과 현명함이 느껴졌다. 금방 사랑에 빠진 나는 또 고백을 했다.
며칠 고민을 해본다던 그 오빠는 우리가 서로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니까 천천히 알아가 보자고 했다. 몇 번 데이트를 하고 나자 오빠가 나에게 교제를 제안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준다니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내가 받고 있던 학업적 스트레스가 소멸될 만큼의 극적인 기쁨을 주었던 것 같다. '약대 진학을 못하게 되면 어떤가, 지금 행복하면 된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연애 초반에는 공부하다가 자꾸 오빠 생각이 나서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모태 솔로였던 나에게 첫 연애는 참 어려웠다. 연애 관련 글을 찾아보기도 하고 선배 언니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해 보았는데 잘 해내지 못했다. 도대체 밀당은 어떻게 하는 걸까? 보고 싶다는 마음을 조급하지 않게 조금만 표현하고, 그 사람이 반응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정말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몰랐다. 밀당이고 뭐고 잘 못하겠던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그에게 많이 표현했다.
불안하지만 행복한 연애를 그렇게 몇 달. 그 사이 아빠가 보내주신 돈으로 차를 샀다. 점점 학업이 바빠지는데 차가 없으니 이래저래 불편했는데, 차가 생기니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언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에 신났다. 초보 운전이었지만 학교에 가는 시간도 훨씬 절약되었고 장 보는 것도 수월해졌다. 그리고 약학 대학원 원서를 지원했고 겨울 방학이 왔다. 미국에 가족들이 있는 친구들은 본가로 가는데, 본국으로 돌아가기 짧은 겨울 방학 동안에 유학생들은 대부분 학교에 남아있었다. 대학생 배낭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던 나는 지금 아니면 못 갈 것 같은 마음으로 호주 시드니 왕복 비행기표를 끊었다. 제일 싼 비행기표라 환승도 2번이나 해야 했고, 한인 민박 숙소는 생각보다 별로였지만 혼자 예산에 맞춰 여행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여행을 해내는 내가 기특했다. 호주 시드니 항구를 한 바퀴 걷는데, 정말 이곳이 천국 같았다. 진한 하늘색 하늘에 솜사탕처럼 띄엄띄엄 수놓은 흰 구름, 하늘보다 좀 더 짙은 파란색의 바다, 살랑살랑한 바다 바람, 아치형의 시드니 하버 브리지와 함께 보이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나에게 시드니는 살얼음판 같은 부모님 사이의 냉전을 경험해야 하는 한국의 집이나 치열한 전장 같았던 미국에 비하면 숨통이 트이게 해주는 고마운 곳이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자 남자 친구를 다시 반갑게 만났고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약학 대학원에서 1차 서류 전형에서 합격한 지 여부가 이때쯤 발표되는데, ‘약대 못 가면 어때?’라고 여유만만한 나는 없어지고 ‘약대 아니면 나는 죽어.’하는 절박한 불안감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졸업이 한 학기 남은 남자 친구와의 미래도 불투명하다는 점이 나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남자 친구는 본격적으로 여러 기업들과 인터뷰를 하며 취업을 준비했는데, 내가 가끔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뜨뜻미지근한 대답이 점점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식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더 오빠를 좋아해도 괜찮았는데, 점점 오빠와 나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것 때문에 이 관계는 곧 끝이 나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약학 전문 대학원 1차 서류 전형 합격. 휴!
합격의 기쁨도 잠시, 2차 면접을 준비하는 와중 학점도 잘 유지해야만 했다. 인터뷰를 1주일 정도 앞두었을 즈음인 어느 금요일, 몇 달 동안 괜찮았던 폭식증이 다시 와버렸다. 30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안에 내가 먹어치워 버린 음식들은 엄청났다. 구역질을 해보려고 몇 번 시도해 보지만 실패. 그깟 멘털관리 하나 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 자괴감, 불안감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이 휘몰아치며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하필 그 순간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런 못난 모습을 들키기 싫었던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 안의 모든 불을 끄고 가만히 침대에 앉아서 멍을 때리며 그렇게 몇 시간, 늦은 밤에 성당 친구와 언니에게도 전화가 몇 통 왔고 그 전화 역시 나는 받지 않았다.
그러고 얼마 후인가 현관문을 쾅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 친구였다.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되었던 남자 친구가 내가 아무런 답이 없자 집 앞에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제야 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한데,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오늘은 좀 혼자 있고 싶어.’ 오빠는 답장했다: ‘일단 아무 일 없다니 다행이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 친구들한테도 연락했는데 걔네도 연락이 안 된다니까, 혹시 다치거나 쓰러진 건 아닌지 경찰을 불러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어. 어떻게 이렇게 걱정을 시켜…’
부끄럽고 미안함에 나는 오빠한테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지만, 나의 폭식증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오빠의 그 문자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빠는 내가 곧 대학원 인터뷰도 앞두고 있어 긴장감이 심할 테니,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자고 먼저 제안했다.
인터뷰는 어찌어찌 끝났다. 물어본 질문들에 대답은 다 하였지만, 지금 내가 약사가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나는 서툴고 미성숙한 모습이 많이 보였던 것 같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떨어져 미국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힘들다는 티도 냈고, 공부가 힘들다는 얘기도 했던 것 같다. 약사가 왜 되고 싶은 건지에 묻는 대답에 나는 나는 유학생으로 빠르게 성공해야 하기 때문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도 솔직하게 얘기했다. 한마디로 인터뷰의 전형적인 오답만 골라서 답변한 것이었다. 모범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나를 계획과 목표라는 틀에 가두던 답답함이 터져 나오면서 삐걱거렸던 것이었을까?
인터뷰를 끝내고 며칠 후, 한 카페에서 남자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설명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기 위해 여러 번 글을 써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오빠를 보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관계의 답은 이별이었고, 이 이별을 어떻게 서로 덜 상처받게 할지 우리는 그동안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빠에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의 자존감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폭식증을 겪는 나의 불안정한 상태, 그리고 오빠와의 연애가 불안하다는 말도 했다. 오빠의 마음이 나의 마음보다 크기가 작은 것 같아서 불안하고, 곧 졸업을 앞둔 오빠는 곧 학교를 떠날 테니, 우리에게 이별밖에 답이 없는 것 같아서 힘들다고 말했다.
눈물 흘리며 얘기하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오빠는 마침내 입을 떼어 말했다. 우리는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낫겠다고…
그렇게 나의 첫 연애는 끝이 났다. 오빠와 함께 윤하의 ‘우리 헤어졌어요,’ god의 ‘헤어짐보다 아픈 그리움’ 노래를 들으며 같이 부르곤 했었는데, 이 노래가 우리의 이별곡이 되다니… 우리에게 이별이 옳은 선택이었음이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다. 나의 첫사랑은 학교생활이나 사랑에 있어 아직 미숙했던 마음이 아팠던 아이에게는 너무나 버거웠던 걸까.
3. 방황의 시기
약학 전문대학원 합격자 발표가 코앞이었다. 나는 지금처럼 폭식증이 있는 상태면 혼자 유학 생활을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룸메이트를 찾기로 했다. 마음 맞는 성당 언니와 다음 학기부터 함께 살기로 하고 같은 아파트에 있는 방 2개 아파트를 계약했다. 그 언니는 조용하고 털털하며 배려심이 깊은 언니였는데, 나보다 더 성숙하고 배울 점이 많은 언니였다. 대학원이 시작되면 더 바빠질 텐데 멘털 관리를 잘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언니와 함께라면 덜 외로운 유학 생활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나는 합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내가 목표했던 것들을 이루어냈으니, 나에게 이번에도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불합격!
내 인생 이제 망했다…
안 그래도 학교 곳곳에 남자 친구와의 추억이 깃들어있어서 마음이 힘들고 헛헛한데, 약대까지 불합격하니 내 주위 모든 것들에 정이 떨어졌다. 불안함때문인지 폭식증은 심해졌다. 어느 날은 토하려다가 또 실패하고 누워서 자려는데 음식물이 위에 갑자기 가득 차서 뱃가죽이 당기고, 숨을 쉬기가 약간 버거울 정도였다. 그동안 학점 A에 목숨 걸고 학업을 관리해 왔는데,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 일상을 보내다 보니 해부학과 생리학 수업에서 C를 받고야 말았다.
전화기를 들어 엄마에게 용기 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엄마, 나 집에 갈래!”
망가져버린 나를 위해 곧 엄마가 오시고 다행히 힘들었던 2학기가 끝났다. 유리처럼 산산조각 난 나의 정신력을 회복해야 대학 공부이든, 유학 생활이든, 의미 있게 잘할 것 같았다. 엄마와 깊은 상의 끝에 나는 휴학을 결심하고 학교에 휴학서를 제출했다. 함께 살기로 했던 언니에게는 미안했지만, 당장 여기서 탈출하고 싶었던 나는 다른 친구를 룸메이트로 찾아서 연결해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만큼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정신적으로 몰려있었던 것 같다. 나의 차와 모든 짐들은 당분간 보관소에 맡겨두고, 애증의 그 동네에서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오고 몇 달은 잠만 잤다. 햇빛을 보는 것이 싫어서 블라인드를 치고, 방문을 닫고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유일하게 밖으로 나가는 시간은 식이 장애를 전문으로 상담하는 정신과 예약이 있는 날이었다. 처음 몇 달은 나의 강박적 완벽주의 성향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상담하러 갔는데, 왜 자꾸 생각하기 싫은 나의 어린 시절 얘기를 물어보나 답답했다. 또래보다 항상 성숙하다는 “칭찬”을 어른들에게 받고 자랐던 나의 어린 시절은 알고 보면 정말 생각하기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은 우울함 그 자체였다. 이상하게도 그 시절 얘기를 상담 시간에 하나 둘 꺼내고 나면 평생 꾹꾹 눌러왔던 어리고 여린 내가 튀어나온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렸을 때는 엄마와 아빠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서운함과 짜증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평생 동안 억눌러왔던 어른스러운 거짓 가면에 숨겨져 있던 사춘기가 와 버린 것이다.
스물한 살, 모범생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저의 삶에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저의 미성숙함으로 상처를 주게 된 인연들에게 깊이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이 세상이 서투른 청춘들의 삶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식이 장애를 겪고있는 여러분들이 있다면, 꼭 용기내어 상담 치료를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이번 주도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