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입생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대학교 신고식은 시작부터 외롭고 치열했던 것 같다. 학생비자가 거절되고 재신청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가 되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이미 놓치고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과 첫 학기를 준비하는데 주어진 시간은 고작 이틀. 갈 길은 구만리인데 한국에서 미국 대학교까지 가는 길은 또 어찌나 멀던지... 인천에서 시카고 공항까지 비행기를 타고간 후, 시카고 공항에서 대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4시간 정도를 더 가야했다. 난기류때문인지 목구멍까지 가득찬 긴장감 때문인지 구토를 몇 번이나 하고 얼굴이 사뭇 핼쑥해지고 나서야 옥수수 밭이 가득한 작은 대학교 마을에 도착했다. 다행히 엄마가 대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계약해두셔서 나는 몸만 들어가면 되었지만, 난생 처음 혼자 살게 된데다 학기가 곧 바로 시작해서 짐을 풀고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감사히도 엄마가 연락을 하셨던 대학교 한인 성당 커뮤니티에서 선뜻 손을 내밀어주셨는데 특히 약대 4학년 선배 언니와 그 언니의 정착을 도와주신 현지인 메리 아주머니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두 분의 도움덕분에 부랴부랴 이틀안에 핸드폰과 인터넷을 연결했고, 학기에 필요한 서적, 필기구, 생활용품, 식료품 등을 샀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교 신입생들은 빠른 적응과 저렴한 주거비를 위해 2인 1실 또는 4인 1실 방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 나도 기숙사 생활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난 문화도 다른 이들과의 단체생활에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내가 다니는 독서실에서 같은 반 친구를 만나면 혹시 집중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다른 독서실로 금방 옮겼던 나였다. 나는 워낙 혼자 있는 게 익숙했고 약대진학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다. 유별나게 깔끔한 성격이라서도 아니지만, 작고 사소한 문제들로 룸메이트와 갈등때문에 고생한다는 여러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어서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을 택했다. 매일 첫 수업은 아침 7시 30분이었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학교 수업이 있는 건물까지 다니는 버스가 30분에 한 대가 있어서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6시 반 정도에는 버스를 타야 했다. 매일 인적없는 새벽녘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과 해질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 복습과 예습을 마치는 것은 점점 내게 익숙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1학년 1학기 수업은 대체적으로 고등학교보다 약간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확실히 대학교에서는 공부해야하는 범위가 훨씬 넓었다. 하루만에 전공 서적 30장이 넘게 해당되는 내용들을 배웠는데, 나중에는 책을 미리 읽을 시간은 없고 수업에서 다룬 교수님이 준비하신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복습하기에도 바빠졌다. 시험은 또 어찌나 자주보는지… 특히 일반 화학과 생물은 퀴즈를 일주일에 한 번씩 보았던 것 같다. 한 반에 200명 정도의 신입생들이 강당에서 수업을 듣고, 20명 정도의 그룹별로 실험 시간이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따로 조교선생님들이나 교수님께 찾아가 질문하기도 했다. 공부하는 애들만 공부했던 고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대학교에 오니까 정말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학구적인 학업 분위기에 나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종종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토요일이면 한인 성당 커뮤니티에서 미사를 드리고 친구들, 선배들과 같이 저녁을 먹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참가하지 못하고 학교 생활을 시작한데다,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는 나는 친구가 없었는데 성당에서 만나게 된 친구들과 선배들 덕분에 조금 덜 외로워졌던 것 같다.
내가 간과했던 사실은 혼자 살면서 해야하는 집안일들이었다. 갓 대학생이 된 나는 여태껏 청소를 해 본 적도, 빨래는 커녕 정리조차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청소며 빨래, 정리, 설거지같은 집안일들은 모두 어른들의 몫이었지 내 의무가 아니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때 실내화 빨기 숙제가 있을때면 실내화를 큰 솔에 세제를 묻혀서 대야에 물을 담아두고 몇 번 빨아보고, 걸스카우트 시절에 선배들과 떡볶이와 김밥을 같이 만들었던 게 정말 전부였던 것 같다. 거실에는 시카고 이사 업체에 맡겨두었던 각종 이삿짐 15박스가 내가 정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주말에 간신히 빨래만 하는 처지였다. 미국 세탁기는 또 어찌나 소리가 큰지… 세탁기를 돌려두고 공부를 하려면 은근 소리가 신경이 쓰여서 방문을 꼭 닫고 이어폰을 꽂고 공부를 했다.
밥을 잘 챙겨먹는 것은 또다른 도전이었다. 외할머니나 어머니가 차려줬던 건강한 집밥은 이제 보니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건강한 음식은 커녕 학식이나 주변 레스토랑에서 볼 수 있는 건 거의 고칼로리 음식이 대부분이었는데 한국에서 겨우 살을 뺐던 내가 이런 음식들을 먹게 된다면 또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아침에는 계란 후라이나 스크램블에 된장에 두부, 양파를 넣고 대충 끓여서 김과 햇반에 먹었고, 점심에는 샌드위치를 싸가거나, 학생 회관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최대한 간단하게 있는 걸 먹거나, 귀찮으면 안 먹고 공부하다 그냥 자버렸다. 집에서 밥을 먹고나면 또 설거지거리나 쓰레기가 생기는데다 다음 메뉴를 걱정하는데 에너지를 쓰느니 끼니를 거르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나는 몸이 점점 약해져갔다.
2. 엄마와의 재회
2년의 캐나다 생활 후 미국 취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엄마는 바쁜 나날들을 보내셨다. 대학생이었던 오빠는 모교에서 대학원생이 되었고, 집에서 통학하느라 바쁜 오빠를 위해 맛있는 아침을 차려주시고, 간호 전문 대학교에서 강의도 하시고, 틈틈이 영어 공부도 계속 하셨다.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는 무탈한 편이었으나, 부부 사이가 오래 떨어져있었다고 더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엄마는 외로움에 투정하는 딸과의 전화 통화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라오셨다. 19살의 나는 법적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가 그리운 어린 아이였다.
엄마가 미국에 오시고 나의 일상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삿짐 박스는 조금씩 정리가 되었고, 집 뒷 편에 있는 미국 대형마트에 엄마가 매일 걸어가서 필요한 식료품과 집안 살림가지를 채워주시는 덕택에 나의 일상이 윤택 해졌다. 예전에는 눈 여겨본 적 없었던, 엄마의 살림하는 법을 차근차근 물어보며 배웠다. 엄마도 직장 생활을 오래 하셨고 살림은 외할머니가 다 봐주셨기 때문에 살림이 서투른 편이시지만, 살림 왕초보인 나에게는 엄마가 여전히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엄마의 밥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맨날 차려먹기 귀찮았던 끼니가 영양 가득한 식단으로 채워졌고, 운동할 시간은 내지 못하면서 살은 빼겠다고 금식하고 절식하던 나의 식습관에 약해졌던 나의 체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공부도 더 집중해서 할 수 있었다.
3. 완벽주의와 식이 장애
엄마는 나와 함께 미국에서 3개월을 보내시고 다시 한국으로 가셨다. 더 오래 계실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미국에서 무비자 입국은 90일이 최대라 어쩔 수 없었다. 엄마와 헤어지고 몇 일은 울음 바다였다. 그러다 또 마음을 추스리고 혼자 열심히 해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몇 달은 또 열심히 잘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혼자 잘 지낸 시간은 짧았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마음이 힘들어졌다. 내가 선택한 유학이고, 내가 선택한 해외 생활인데, 이 우울이라는 괴물은 어디서부터 나를 잠식해왔을까?
내가 입학한 약예과에서 매년 절반도 안되는 학생들이 약학 전문 대학원에 입학한다고 한다. 다른 대학에서 2년의 학부 생활을 이수한 학생들도 많이 지원하기때문에 약대 경쟁률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엉덩이 붙이고 공부하는 것에 어느정도 자신감이 있었던 나지만, 내가 과연 높은 경쟁률을 뚫고 약학 전문대학원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인지 늘 불안해했다. 약예과 동기들은 다 경쟁자로 보여서 말도 잘 섞지 못했다. 1학년 2학기부터 즈음부터 학교 생활이 버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한 만큼 학업적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학업 이외에도 봉사 활동, 동아리 활동 등 약대 입학에서 중요한 부분들도 더불어 완벽히 해내겠다는 욕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성취하면서 살은 찌지 않아야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혼자 지내며 학업에 집중하다 보니 건강한 식사가 다시 힘들어졌다. 살이 찔까봐 절식을 하고, 매일 몸무게를 재는 나쁜 습관이 다시 돌아와버렸다. 아마 이때쯤 이었던 것 같다. 내가 처음 폭식증을 겪었던 날.
학교에서 수업을 잘 듣고 집에 와서 공부를 하다가, 공부에 잘 집중이 되지않고 내가 마음먹었던 범위까지 끝내지 못했는데 갑자기 느껴보지 못한 허기짐이 찾아왔다. 냉장고에 냉동 파스타가 보였다. 데워먹었다. 반은 남기려고 했는데 어느 새 다 먹어버렸다. 오렌지와 초콜렛 바, 버터 쿠키 12개, 감자칩이 보였다. 다 먹어치웠다. 하지만 허기짐은 가시지 않았고 곧바로 라면에 계란을 풀어먹고 밥까지 말아먹었다. 머릿속에 꺼져있던 스위치가 다시 켜지는 느낌이 들자, 내가 1시간 안에 먹어치워버린 음식들의 흔적이 보였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을 양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버린 것이었다.
순간 목구멍으로 우겨넣었던 음식물이 느껴지며 구토감이 밀려왔다. 메슥거림에 몇 번 헛구역질을 했고, 물을 마시며 속을 달랬다. 지금 내가 어떻게 이 많은 음식을 먹은건지 영문을 몰랐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내 몸을 조종해서 먹은 음식들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걸신들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이보다 더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 후에도 폭식증은 나의 가장 바쁘고 불안이 가득해지는 순간에 여지없이 찾아왔다. 폭식증이 오면 나는 1시간동안 쉼없이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다 먹어댔다. 정신이 든 후에는 이토록 많은 음식을 먹은 것이 죄책감이 들어서 몸무게가 다시 빠질 때까지 절식이라는 방식으로 내 몸에 벌을 주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학기가 끝났고 방학이 되어 한국으로 갔을 때쯤, 바지 사이즈가 2인치는 더 늘어나있었다. 부모님은 나의 모습을 보고 놀라셨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여름 방학, 3개월간의 한국 생활은 나에게 언제 폭식증이 있었냐는듯이 너무나 정상적이었다. 일상의 압박에서 잠시 해방된 나는 가족과 건강한 집밥을 먹게 되었고, 배가 부르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매일 운동을 하는 건강했던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듯했다. 하지만, 학기가 다시 시작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자, 폭식증과 이별한 줄 알았던 나의 생각이 큰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과거가 되었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이번주 글을 썼던 것 같아요. 미성숙한 시절 저의 이야기들을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