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등학교 졸업
한국에 고3이 있다면 캐나다에는 12학년이 있다. 비록 한국만큼 피 튀기는 경쟁은 없지만, 캐나다인들에게 12학년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캐나다에 온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나에게도 12학년이 오고야 말았다. 졸업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캐나다와 미국의 약대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던 나는 총 20개 정도 대학교에 원서를 지원했다. 지금과 다르게 그 당시 대학교 원서 지원은 작성된 지원서를 프린터로 출력해서 우편으로 보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기에 우리 집 근처 우체국을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들락거린 기억이 난다. 외식조차 꿈도 못 꾸었던 우리 모녀의 캐나다 생활에서 가장 아낌없이 돈을 썼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비록 내 영어 실력은 매우 부족했지만, 학교 생활을 성실히 한 점과 우수한 성적, 병원 봉사 활동을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11학년 2학기 때 SAT (미국 대학 입학시험)를 보고 각 대학교당 요구하는 에세이 (자소서)를 쓰면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그 학교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에 내가 얼마나 부합하는지 설명하려고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또 우리 집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 내 마음속에는 20개의 학교 중에 어느 학교이든 합격만 한다면 감사히 다닐 수 있을 마음이었지만, 해외 유학생은 학비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에 설사 합격을 하더라도 장학금 보조가 없다면 진학을 포기할 각오까지 했다.
다행히도 나의 간절함이 통했던 것인지 10개 정도의 대학교에서 합격증이 왔다. 유학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감사하게도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것 같아서 눈물 나게 뿌듯했다. 지금도 그때의 벅찬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이다. 자기 칭찬에 인색한 나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나의 수고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엄마는 물론이고, 한국에서 외롭게 지내던 아빠와 오빠에게도 나의 대학 합격 소식은 올림픽 금메달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합격한 학교들 중에서 나는 미국 중부에 위치한 한 대학교를 선택했다. 약대가 훌륭한 주립대 중 한 곳이고, 물가가 저렴한 중부에 위치해 있어 생활비를 아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 끌렸다. 또 이 대학교에서 합격증과 함께 대학 4년간 이사장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도 받았다. 장학금 보조 덕분에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비용과 비슷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부모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는 이 대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윽고 캐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그동안 감사했던 여러 선생님들과 인사를 했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미국 대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내가 처음이었는데, 나의 미국 대학 진학 소식을 들은 여러 선생님들이 응원의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곱슬 장발 머리에 늘 셔츠에 청바지를 입으셨던 이탈리아 교포 멋쟁이 음악 선생님, 어릴 때부터 뇌 질환으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시는 이집트인 과학 선생님, 희끗희끗한 긴 수염이 꼭 산타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수학 선생님, 뽀글뽀글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뚜렷한 이목 구비가 참 예뻤던 유대인 여자 과학 선생님, 다녀온 여행지 얘기들을 실감 나고 재미있게 들려주셨던 이야기꾼 지리 선생님, 베트남에서 늦게 이민오 셔서 영어 발음이 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누구보다 따뜻하시고 유머러스하시고 한국 문화를 좋아하셨던 수학 선생님, 늘 재미있고 흥미로운 주제로 수업을 시작하셔서 모든 학생들이 집중하게 만들었던 중국인 교포 새내기 과학 선생님, 폴란드 출신 ESL 수업을 가르쳐주신 카리스마 있던 영어 선생님과 매우 깐깐하게 점수를 주셨던, 길고 흰머리가 매력적이신 12학년 영어 선생님까지… 감사한 인연들을 참 많이 만났다.
사실 공부 강도로 따지자면 한국 고등학교가 훨씬 힘들고 고돼서, 학업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캐나다 고등학교를 벌써 졸업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이렇게밖에 공부를 안 했는데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나는 토론토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2. 캐나다 이제 안녕
미국 대학교 진학을 결정한 후부터 엄마와 나는 이삿짐을 싸느라 바빠졌다. 비록 정신은 없었지만 마음은 뜰 뜨고 신이 났다. 이삿짐을 싸면서 틈틈이 2년 동안 미루어두었던 토론토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우리 집 앞으로 다니던 빨간색 전차를 타고 종점까지 가보기도 하고, 콕스웰 지하철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토론토의 동쪽 끝까지 가보기도 했다. 정들었던 이곳을 떠나면 언제 또 오게 되나 생각을 하며 우리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에 붙어있던 정겨운 초등학교, 겨울이면 스케이트 탔던 그 학교 운동장, 엄마와 산책하던 집 근처 골목들, 매일 장 보러 갔었던 캐나다 마트 노 프릴스 (No Frills), 집 근처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있던 중국인 가족이 운영하는 꽃집, 그 옆 친절한 동네 우체국, 집에서 한 블록 걸어가면 나오던 이국적인 인도 거리와 그곳에서 종종 사 먹었던 인도식 옥수수 구이, 30도가 넘는 더운 여름밤에 공부할 거리를 들고 자주 갔었던 팀 홀튼 (Tim Hortons), 주말이면 자주 갔었던 영 스트리트 (Young Street)에 있는 토론토 공립 도서관, 애글링턴 (Eglington) 역에서 한인 성당까지 버스 타고 가던 길, 노스욕 (North York)에 있던 없는 게 없는 한인 마트 갤러리아와 한인 타운이 있는 크리스티역에서 명희 아주머니와 함께 먹은 북창동 순두부까지… 이 모든 장소와 풍경들을 마음에 잘 새기며 작별인사를 했다.
2년 동안 알게 되었던 친구들과도 작별 인사를 나눴다. 북미 고등학교에서는 졸업 전에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프롬 (Prom)이라는 졸업 파티를 여는데, 나도 중고 샵에 가서 드레스와 뾰족구두를 사고 여러 블로그들을 보면서 난생처음 파티 화장도 해보았다. 친구들과 다들 성숙해진 모습으로 멋진 턱시도와 예쁜 드레스를 입고는 온타리오 호수 위 요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말 미드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불가리아 친구 알렉산드라는 인테리어 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에 합격했고 오랜만에 할머니를 뵈러 불가리아에 방문한다고 했다. 이 친구 외에 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 모두 다 캐나다 대학에 합격하여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물론 대학을 안 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북미 지역 대학교는 입학은 비교적 쉽지만 졸업이 어려워서 “우리들 모두 꼭 대학교를 졸업하기를!” 하면서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미국에 위치한 한인 이삿짐센터 창고에 나의 짐들을 맡겨두고, 밴쿠버와 밴프 국립공원을 여행하는 패키지 상품으로 짧게 혼자만의 졸업 여행을 갔다. 이후 미국 비자 인터뷰를 봐야 했던 나는 한국으로 귀국했고, 엄마는 미국으로 건너가 내가 다닐 대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미리 알아보기로 하셨다.
대학 합격 후 나날들은 너무 행복했고, 앞으로도 내 앞에는 꽃길이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3. 미국 비자 거절 맛 좀 볼래?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본 후 내 앞에는 초록색 레터가 놓여있었다.
학생비자 거절.
순탄할 것만 같은 나의 유학 생활에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내가 다니게 된 미국 대학교 첫 학기의 시작은 8월 마지막 주 월요일이었는데 1학년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그 전주에 예정되어 있었다. 비자 인터뷰는 8월 초여서 한국으로 돌아간 7월부터 한 달 정도 여유가 있었다. 정말 매일매일이 행복했던 한국에서의 여름 방학이었다.
비자 인터뷰 당일, 아빠가 연차를 내셔서 아침 일찍부터 광화문으로 같이 가주셨다. 광화문 교보 문고는 어릴 때 종종 가보았는데 바로 근처에 있는 미국 대사관은 처음이었다. 주차를 하고 비자 인터뷰 예약 시간에 맞춰서 줄을 서렸는데 이미 아주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이 한 손에는 서류를 들고 줄을 서 있었다. 내가 줄을 서고 10분 만에 내 뒤에 스무 명 정도는 더 줄을 섰다. ‘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늘 미국 비자 인터뷰를 보는구나!’
아빠가 내가 들어갈 차례가 되자 “파이팅!”을 외쳐주셨다.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예약증 보여주시고 여기 서세요!”
허리에 권총을 꽂은, 삼엄하게 무장한 대사관 경비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비행기 탑승 전 심사처럼 모든 소지품을 검사받고 신체 검색대를 통과했다. 핸드폰은 반입이 안 되어서 입구에 맡겨야만 했다. 다행히 첫 관문은 무사통과! 이후 안으로 들어와서는 어디에 앉을 데 없나 두리번거렸지만, 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또 서 있어야만 했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의자는 없었다. 희한하게 사람들은 많았지만 무거운 분위기에 불평불만 소리도 나올 틈이 없었다. 삼엄하고 냉혹한 분위기에 약간 눈물이 나올 것 같이 무서워질 때쯤, 예약 시간보다 2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내 차례가 되었다.
눈이 파란 백인 영사에게 나는 여러 서류들을 내밀었다. 영사는 나에게 혹시 한국어 통역이 필요한지 물어보았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곧 영사가 엄마에 대해서 물어봤다.
“엄마가 미국 영주권 신청을 하셨는데 너는 알고 있니?”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엄마가 미국 간호사 자격증이 있는 것은 알고 있어요. 저는 미국 대학교에 합격해서 학생 비자를 받으러 왔어요.”
한참을 컴퓨터를 들여다보더니 영사가 문제의 초록색 종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자 여기 있다. 변호사와 상담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도대체 어찌 된 것인지 영문을 몰랐다.
대사관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아빠와 광화문 미진에서 메밀국수를 먹었다. 아빠는 내가 비자가 거절이 된 것 같은데,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여름에 냉 메밀국수를 참 좋아하는데, 비자가 거절된 그날 먹은 냉 메밀국수는 제일 맛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빠와 나는 미국 대사관 근처 이민 변호사 사무실을 몇 곳 방문했다. 변호사와 직접 상담을 한 곳은 한 곳이었고, 나머지는 직원이 상담을 해주었다. 종이를 보여주고 영사가 나에게 해준 얘기들을 전하니 비자를 재신청하면 되는데 준비할 것들이 많고 특히 영사가 물어볼 예상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많이 연습해야 해서 합숙까지도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에 가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기로 한 대학교를 비자 때문에 가지 못한다니… 억울해서라도 다시 비자를 신청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상담을 한 변호사들이 다 믿음이 가지 않아서 네이버 지식인을 꼼꼼히 찾아보다가 한 이민 변호사를 알게 되었는데, 그분이 일을 잘 처리해 주실 것 같아서 상담 예약을 했다. 그분의 이야기는 미국 대사관 근처 이민 변호사 사무실에서 들은 이야기와는 사뭇 달랐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2년 전 유학을 떠나기 전에 엄마는 이미 미국 간호사로 영주권을 신청한 상황이었고 나 역시 영주권 신청이 같이 들어간 상태였다. 영주권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다른 미국 비자를 신청할 수 없고 미국에 입국해서도 안되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학생비자를 신청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변호사가 권유한 것은 영주권이 승인될 때까지 한국에서 대기한 후 미국에 건너가거나 엄마의 영주권 신청을 취소하고 나의 학생 비자를 재신청하는 두 가지의 선택지였다.
황급히 미국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세한 정황을 몰랐던 엄마도 깜짝 놀라셨다. 엄마도 영주권 신청과 미국 이민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전화를 끊은 후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하루 정도 고민을 하시다가 결국 이민 비자가 언제 승인이 날지 모르는 일이고, 딸의 공부도 때가 있는 법이니 엄마가 진행 중인 영주권을 취소하겠다고 하셨다. 미국 간호사로 일을 하시려고 오래 준비하셨던 엄마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당시 우리 가족이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학생비자 재신청을 하고 다시 본 영사와의 인터뷰는 정말 순조로웠다. 엄마의 이민 비자 취소한 내역을 보여주니 금방 학생비자가 승인되었다. 비자 발급을 위해 여권을 제출하고 얼마 후 택배로 미국 비자가 찍힌 여권을 받았다. 아슬아슬하게 나는 미국 대학교 학기 시작 이틀 전에 도착하여 겨우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미국에서 영주권을 받기까지 갖은 고생을 하며 13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는데, 종종 엄마의 이민 비자 승인을 기다렸다가 우리 모녀가 미국으로 갔더라면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상상해 본다. 엄마는 간호사로서 최소 10년은 일하셨을 것 같고, 엄마 덕택에 영주권자가 된 나는 미국 주립대에서 신분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취업했겠지. 하지만 한국에 있는 아빠와 오빠와는 더욱 단절되어 살게 되었을 것이고, 10대 후반에 유학을 시작한 내가 지금도 영어나 문화차이 때문에 미국에서 일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50이 넘은 우리 엄마가 이 힘듦을 모두 겪으셔야 했겠구나… 어찌 보면 굽이굽이 돌아간 것 같은 길이지만 우리 가족 모두의 행복을 지키기에는 이 길보다 더 좋은 길은 없었다고 믿는다.
이번 주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고난과 역경의 미국 유학 생활이 펼쳐집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