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만난 한국인들

by 티나


이번 주는 캐나다에서 내가 만난 한인 이민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문방구 아저씨네 가족들


아저씨가 운영하신 문방구는 몇십 년 동안 그 지역에서 자리를 지킨 역사가 깊은 문방구였다. 아저씨네 가족은 문방구 2층에 사셨다. 이 문방구는 유색 인종이 드물고, 온타리오 호숫가 가까이 있는 동네에 있었는데, 가끔 문방구에 가면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말이 문방구이지, 문구류 이외에도 카드, 인스턴트식품, 주스 및 음료, 파티용 장식품들, 사진 인화기, 그 외에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들도 있었다. 특히 카드 종류가 많이 있었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카드 문구를 읽고 웃으시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내가 읽으면 그렇게까지 웃기지 않는 문구들이었는데, 그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는 빵빵 터졌다. 또 문방구에서는 풍선에 헬륨 가스도 넣어주시고 선물 포장도 요청하면 해주셨는데, 주말이면 아이들 생일 파티 전에 부모들로 붐비기도 했다. 이 문방구는 거의 쉬는 요일 없이 매일 운영했다.


이 분들이 캐나다 이민을 결심한 이유는 오로지 아이들의 교육 때문이라고 했다. 이 부부에게는 나와 한 살차이나는 큰 딸과 중학생 아들이 있었는데 백인들이 많이 다니는 공립학교에 다녔다. 나와 또래여서 가끔 만나면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언니는 공부를 열심히 하긴 하는데, 비교적 늦게 와서 영어 때문에 아직도 힘들다고 했다. 특히 영어 원어민이 아닌 외국인들이 어려워하는 것은 어떤 단어 앞에 ‘a’를 쓰고, 어떤 경우에 ‘the’를 쓰는지인데, 이 언니도 에세이를 쓸 때 특히 이 부분이 아직도 어려워서 남동생한테 첨삭을 부탁한다고… 남동생은 영어 발음만 들으면 완전 원어민이었다. 누가 봐도 현지에 적응을 잘한 것처럼 보이는 두 남매는 부모님이 영어로 된 각종 서류들을 받으실 때마다 처리해 주고, 전화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도 해결해 주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이민 1세대 부부에게는 아주 든든한 아들, 딸이었다. 이 가족이 전형적으로 캐나다 이민을 성공한 사례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 가족들을 알게 될수록 부모님의 이민 결정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아들, 딸의 서운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딸은 한국을 늘 그리워하며 볼 때마다 한국 얘기를 했고, 이민 온 지 5년이 되었어도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아 보였다. 자기는 한국이 너무 좋아서 졸업하고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나에게 종종 말해주고는 했다. 아들은 캐나다에 오자마자 사춘기를 겪게 되어 한국에서 잘 살고 있던 나를 왜 캐나다에 데려왔냐며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다고 했다.


캐나다를 떠나게 되면서 이 가족들과는 소원해지게 되었는데 최근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저씨는 문방구를 처분하시고 은퇴하시어 한국과 캐나다를 왔다 갔다 하신다고 한다. 언니는 캐나다 대학교에서 졸업하고 한국 대기업에 입사하여 회사 근처, 서울 오피스텔에서 싱글로 잘 지내고 있다고. 그렇게 한국 타령을 했던 언니가 한국에서 살고 있다니 드디어 언니가 꿈을 이루었구나 싶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언니의 남동생 이야기였다. 자살 충동도 있고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가족들에게 캐나다 이민은 좋은 결정이었을까? 나도 겪고 있는 일이지만 역시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타지에 이민 와서 현지에서 잘 적응하고 사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2. 명희 아주머니


명희 아주머니를 만난 것은 한인 타운이 위치한 크리스티역 근처 한인 마트였다. 엄마와 이것저것 장을 보고 카트에 물건들을 싣고 나가려는데 엄마가 어떤 아주머니를 보고는 갑자기 그분에게 다가가서는 “너 **여고 나온 *명희 아니야?”라고 물어보셨다. 그분은 엄마를 보자마자 잠시 머뭇거리시다가 “아! 너구나. 어떻게 여기서 만나니?” 하시며 반가워하셨다. 우리 엄마는 사람 얼굴을 참 기억을 잘하시는 편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넘었어도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 않은 반 친구를 이 머나먼 토론토 한인 마트에서 어떻게 알아보셨는지… 참 신기하다.


아주머니는 결혼 전까지 한국에서 사셨는데, 캐나다로 가족 이민을 온 남편분이 한국에 나와 아주머니와 소개팅을 했다가 결혼하게 되면서 토론토에 이주하게 되셨다고 했다. 이분의 슬하에는 아들 셋에 딸이 하나 있는데 막내딸은 나보다 몇 살이 더 어렸다. “—그랬쒀여” 하면서 어렵게 한국말을 하는 그 동생이 참 귀여웠다.


아빠와 오빠가 토론토에 왔었을 때 두 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었는데 참 즐거웠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 그때 가족들이 같이 먹으라고 한국산 배 상자를 하나 주셨는데 한국에서 먹어본 그 어떤 배보다도 달달한 즙이 꽉 찬 아주 맛있는 배였다. 아빠가 종종 명희 아주머니가 준 토론토 배가(물론 한국에서 수입된 백 프로 국산 배!) 정말 맛있었다 회상하시던 게 기억난다.


딸만 바라보며 타지 생활을 하는 우리 엄마에게 명희 아주머니는 든든한 친구였던 것 같다. 가끔 전화하셔서 낭랑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도 해주시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엄마와 내가 캐나다를 떠나기 전 날에 아주머니 댁에서 하루 재워주셨는데, 우리가 공항으로 떠나는 아침에 만들어주신 홈메이드 팬케이크가 기억이 난다. 매일 아침 너무 자주 해 먹어서 레시피도 다 외우셨다는데, 정말 최고로 맛있었던 인생 팬케이크였다.


지금까지 명희 아주머니는 엄마와 자주 연락하며 지내신다. 아주머니의 아들과 딸은 다 졸업하여 결혼을 했고 손주가 생기셔서 집안이 더 북적해지셨다. 최근에는 손주들을 돌보시느라 바쁘시지만 여전히 봉사 활동을 하시고 한글학교에 선생님으로 수업도 하시면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계신다. 가끔 한국에 나오시게 되면, 명희 아줌마가 엄마를 모시고 맛있는 것을 사주셨던 것처럼, 엄마가 아줌마를 모시고 서울의 맛집과 고터몰을 간다.


명희 아주머니는 90세 넘으신 부모님이 미국 시카고에 사시고 자식들은 다 캐나다에 있어서 캐나다가 가장 편하신 분이다. 그래도 한국을 가고 싶어 하신다. 고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 그리워진다고 하시면서. 나는 과연 어떨까?


3. 수산나 할머니


수산나 할머니는 우리가 살던 오래된 아파트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나오면 바로 뒤쪽에 타운 하우스 지역에 사셨다. 우리 집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내리면 역 근처에 성당이 있었는데, 우리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진 한인 성당을 가기 어려운 시험 전 주 같은 경우에는 이 성당에 갔다. 어느 주말에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집 쪽으로 슬슬 걸어오는데 같이 미사를 보았던 동양인 할머니가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할머니와 우리 엄마 두 분 중 누군가 “한국 분이세요?” 말을 걸었고 그 이후로 같은 동네에서 종종 왕래를 하며 지냈다. 할머니는 회사 생활을 하는 아들, 딸과 함께 사셨는데, 내가 무서워하던 도베르만도 키우셨다. 가끔 아침에 개와 산책하시는 할머니의 자제분들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한인 성당에서 할머니와 부활절 전야 미사를 같이 드리고 밤늦게 집에 오면서 어묵탕을 끓여주신다며 본인 댁에 초대해 주셨다. 성격 따라 깔끔하게 정리된 할머니댁을 구경하고 후다닥 끓여주신 어묵탕을 너무 맛있게 먹었다. 고향이 경상도이신 할머니는 젊으실 때 독일에서 간호사로 가셨다가 광부였던 남편을 만나셨다고 한다. 이 부부는 독일에서 사시다가 토론토로 이민하셨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아들과 딸은 둘 다 변호사였는데 나는 그 언니 오빠가 참 멋있게 보였다. 단정하게 다린 흰 셔츠에 정장을 입고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어떤 날은 큰 배낭을 메고 어떤 날은 노트북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한 손에는 커피 또는 아침 대용으로 블루베리 스무디를 들고…


지금 수산나 할머니는 혼자 노인 아파트에서 사신 다고 한다. 할머니 큰 아들은 결혼을 해서 손자가 생기셨고, 딸은 싱글로 할머니와 가까이에서 혼자 사신 다고 한다. 엄마는 세 달에 한 번 정도 한국에서 월간으로 나오는 가톨릭 잡지를 몇 권씩 모아서 자그마한 선물들과 함께 수산나 할머니네 댁으로 보내시는데, 그 소포를 보내신 지도 거의 10년이 된 것 같다. 할머니는 고마운 마음에 선물을 보내시기도 하시고, 현금을 보내시기도 한다. 할머니에게 그 잡지들은 캐나다의 무료한 일상에 잠깐씩 고국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느낌이시라고 한다.


내가 전문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이 언니, 오빠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어가 안되니 변호사는 안될 것 같고, 남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니 의료계 쪽이 나에게 적성에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대나 치대는 피를 봐야 하고 졸업까지 너무나 오래 걸리는 길이어서 피를 보지 않아도 되는 약대에 눈길이 갔다. 게다가 약대는 학부 2년 동안 필요한 수업들을 이수하고 4년 약대 프로그램을 합격하면 6년 안에 졸업할 수 있다고 하는데, 빠르게 경제적 독립을 하고 싶은 나에게 가장 목적에 도달하게 해 줄 것 같은 직업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약대 진학을 목표로 대학들을 알아보았다. 혹시 이루지 못하면 ‘집에 돌아와도 된다’는 아빠가 한국에 계셨지만, 이미 멀리 와버린 나는 반드시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 부담감이 나를 때로는 갉아먹을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엄마가 함께였기 때문에 용기 내어 시도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20년이 된 이야기들이지만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저도 시간 여행을 하게 됩니다. 이번 주도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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