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이야기

by 티나

비록 몇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지내왔지만 여느 가정의 아버지들처럼 과묵하셨던 아빠는 본인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으셨던 분이다. 그래서 과거의 아빠의 이야기는 극히 간략한 기억을 모아 조각모음을 해도 여전히 군데군데 이빨이 빠져있는 그 정도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이제 와서 늦게나마 느끼지만 아빠의 이야기들을 아빠가 살아계셨을 때 더 자주, 더 깊게 나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나도 아쉽다. 그래도 내 기억이 더 열화 되기 전에 아는 한에서 아빠의 일생을 기록해보고자 한다.


1. 아빠의 성장


우리 아빠는 경기도 평택에서 빈농의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아빠가 어릴 때는 너무 개구쟁이였어서 너무 뛰어다니며 놀다 뜨거운 물이 얼굴에 쏟아져 크게 화상을 입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홍당무처럼 늘 얼굴에 홍조가 있었다. 아빠의 아버지는 소위 두 집 살림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빈농의 형편 상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아빠는 중학교 때쯤부터 공부에 눈을 뜨셨지만, 먹고사는 것도 어려웠던지라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못 보고 원하는 학교를 가지 못하셨다고 민망하신 듯 웃으시며 말씀해 주셨다.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는 심 씨 아저씨셨는데, 고등학교 때 유복했던 심 씨 아저씨네 집에서 같이 살며 공부를 가르쳐주고 학비를 버셨다고 한다. 입주 과외 교우로 고등학교 3년 동안 심 씨 아저씨와 붙어 다니던 아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심 씨 아저씨는 아빠의 인생에 다시 한번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아빠의 말년을 이야기할 때 다시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아빠는 운 좋게 서울대에 입학하여 가난한 가정 형편에도 학비 걱정을 크게 하지 않고 대학교를 다닐 수 있으셨다고 한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고등학교 때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시진 않았다고 했다. 대신 수업을 많이 빼먹고 대신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 무전여행을 자주 가셨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빠릿빠릿 편리하고 사람이 빠글빠글한 도시보다, 느릿느릿하고 좀 불편해도 나고 자란 고향처럼 한적한 시골의 자연 풍경을 참 좋아하셨다.


그런 아빠에게 처음으로 경험한 죽음은 대학교 친구의 이른 사망이었다. 사건은 아빠와 대학동기 친구가 무전여행을 떠난 고향 평택에서 일어났다. 당시 그들은 참외를 사러 갔다가 지름길이었던 갯벌을 가로질러 가면 훨씬 빨리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뻘밭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발에는 죽음의 물이 차오르고 있었던 것도 모른 채. 결국 밀물이 차오르고 둘 다 허우적대기 시작했는데 아빠는 다행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친구는 그리 운이 좋지 못했다. 아직 젊었던 아빠에게는 가까운 이의 죽음을 남들보다 조금 일찍 경험하고 말았던 것이다. 50년이나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아직도 눈시울이 붉어지시는 아빠를 생각하면, 그 친구의 죽음은 아빠에게 평생 드리웠던 것 같다.


2. 사회인으로서의 아빠


여차저차 대학을 졸업하고 아빠는 제약 회사 영업 사원으로 입사하셨다. 남을 가르치고 도움을 주시는 일을 좋아하셨던 아빠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고 싶어 했는데, 어려웠던 집안 형편으로 인해 돈을 더 벌 수 있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셨다. 아빠의 아버지는 일찍이 집을 떠나 내연녀와 살림을 차리셨고, 아빠의 큰 형님은 직업 군인으로 일찍 출가하여 사실상 아빠가 남은 여섯 식구의 가장이었다. 아빠의 대학 동기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한국으로 돌아와 모교 교수로 재직하신 분들도 꽤 있고, 미국에 정착하여 FDA에서 근무하신 분도 있다. 하지만 먹일 입이 많았던 아빠는 처음 입사한 제약 회사에서 33년을 근무하셔야만 했다. 어떻게 한 회사에서 33년이나 일하실 수 있으셨을지, 정말 대단한 끈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빠에게 다른 선택이 주어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아빠가 좋아하시는 것은 기록하기, 술, 담배, 골프, 콩, 노각 오이무침, 휴게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통감자 버터구이, 고등어조림, 전기 구이 통닭, 족발, 피자, 햄버거, 핫도그. 아빠가 싫어하시는 것은 남의 흉을 보는 것, 상습적으로 정체되는 서울의 도로, 쇼핑몰, 당근, 버섯, 날 음식… 아빠의 성격은 매우 꼼꼼하고 철두철미했다.


아빠는 술, 담배를 아주 좋아하셨어서 내가 어릴 때부터 아빠의 생신 카드에 단골로 썼던 문구가 술, 담배를 줄이시라는 말이었다. 내가 성인이 되어 약사가 되어서도, 아빠의 건강이 염려되어 술을 많이 드시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시는 것을 늘 걱정했고, 잔소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을 바꾸는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고집이 센 아빠는 하기 싫은 것은 아예 시도조차 안 해보시는, 좀 고리타분하신 분이셨다. 융통성과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빠의 성격을 되짚어보면 지금의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아빠가 살아 계실 때, 아빠와 술 한 잔씩 기울이며 대화를 한 적이 없어서 지금 와서는 그 점이 참 아쉽다. 고집 좀 꺾고 아빠와 종종 대작하며 취중진담을 좀 더 해볼 걸 그랬다.


초등학교 때인가 부모님 직업을 탐방하는 숙제가 있어서 아빠네 회사에 주말에 가본 적이 있는데, 큰 회사에 아빠의 이름과 개발부 부장이라는 명패가 책상에 있는 걸 보고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나한테 아빠는 정말 자랑스러운 아빠였다. 아빠는 개발부에 오래 계셨어서 특허청, 식약청과 교류가 잦으셨다. 개발한 신약이 미국 식약청과 한국 식약처에 동시에 들어가게 되어 특허 분쟁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빠를 포함한 다른 한국의 제약 회사들과 케이스를 준비하여 결국 미국과의 특허 싸움에서 한국이 이기게 되었다고 했다. 아빠는 열정적으로 일을 하셨다. 새벽 일찍부터 일본어 공부, 영어 공부도 하셨고, 10년 이상 매일 아침 6시면 수영을 가셨다가 출근하셨다. 갓생을 살았던 아빠는 회사에서도 인정받아 정년퇴직 전까지는 회사 임원으로 일하셨다.



3. 아빠와 엄마의 결혼


아빠는 엄마를 1983년도, 공통 지인을 통해 소개를 받았다. 엄마는 당시 고려대병설보건대 (지금의 고려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모교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계셨다. 선을 봤던, 지금으로 치면 소개팅으로 엄마를 만나 1년 정도 교제 후, 84년 2월에 두 분은 결혼했다. 엄마가 서른, 아빠는 서른셋에 결혼하셨으니 그 당시로 보면 늦게 결혼하신 편이다. 첫아들을 같은 해 12월에 낳으시고 5년 후, 내가 태어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빠와 여기저기 놀러 다닌 기억이 종종 나는데, 아빠가 회사 일로 바쁘시게 되고, 가족끼리 많이 놀러 다닌 기억이 없다. 아빠는 가끔 오빠가 어릴 때는 많이 놀러 다녔는데, 내가 어릴 때는 많이 놀러 다니지 못해서 아쉽고 미안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런 일상에서 아빠가 그래도 꼭 지키려고 하시던 것이 있다. 바로 가족식사였다. 식구는 밥을 같이 먹는 게 식구라며, 주말에는 꼭 밥을 같이 먹으려 하셨다.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뭐 크게 대화를 했던 것 같지는 않지만, 티브이를 보면서 약주를 하시며 소소한 얘기를 오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빠는 나와 오빠와의 대화를 좀 어려워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놀랍지만 나와 오빠는 아빠한테도, 엄마한테도 혼난 기억이 전혀 없다. 그야말로 방목형 교육일라나... 아빠가 유일하게 우리 둘에게 언성 높여 얘기하셨을 때는 이를 닦지 않을 때였다. 술과 담배를 매우 좋아하셨던 아빠는 40대 초부터 임플란트를 하셨을 정도로, 이 상태가 많이 좋지 않으셨는데 나와 오빠가 밥을 먹고 이를 닦지 않으면, 회초리를 드셨다. 그렇다고 한 번도 우리를 체벌하거나 폭력적인 언어를 쓰시거나 하지 않으셨고 회초리로 겁만 주셨다. 산에 가면 아빠는 회초리 될 만한 길고, 단단한 나무 가지를 찾으셨던 기억이 난다. 몇 가지를 주워오셔서 아주 맨질맨질 윤이 날 정도로 회초리를 칼로 깎아 준비해 두셨다. 이 닦는 습관을 일찍부터 심어주시려고 그랬던 것 같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이를 잘 닦고 있고, 심지어 남편도 이를 고쳐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가 모든 면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의 불화가 그중 하나였다. 아빠는 두 집 살림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왔다. 결혼 이후에도 새로운 가정의 가장이 아닌 친할머니와 삼촌 고모들의 가장이었고 아빠가 번 돈은 모두 그들에게 흘러들어 갔다. 아빠는 당연히 본가의 살림을 아빠가 결혼 후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할머니, 삼촌, 고모들도 이를 당연히 여겼다. 오빠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는 혼자서 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에 지친 나머지 집에서 나와 친정에 가셨는데, 큰 외삼촌과 아빠가 터놓고 대화를 한 후, 아빠의 월급 중 100만 원을 엄마에게 자동이체시키셨다고 들었다. 아빠는 본가에서는 착하고 돈 잘 버는 일등아들이었지만, 엄마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꼴찌남편이었다.


엄마와 외할머니로 인해 남편으로서 아빠의 부정적인 모습을 일찍부터 알게 되어버린 나는 내가 보는 아빠로서의 모습과 엄마의 남편으로서의 모습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 참 힘들었다. 부부관계가 좋은 친구의 부모님을 보면서 행복한 가족은 행복한 부부로부터 온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한국에서 걸어야 할 길을 생각해 보니, 엄마와 아빠가 걷는 길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셔서 나름 명문대를 졸업하셨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셨지만, 그분들의 삶이… 내가 원하는 삶인가, 내가 행복할 삶인가를 깊이 고민했고, 어린 마음에 내가 자란 이 가정과, 이 사회가 싫어졌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열망이 유학을 결정하게 만들었고, 우리 가족은 2년 동안 기러기 생활을 했다. 식구는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던 우리 아빠한테 나의 유학 결정은 청천벽력이었다.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끝내 허락해 주신 나의 유학길, 그때 결정이 우리 가족을 더 불행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가 알을 깨고 시야를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확실하다.




이번 주도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게 꽤 오래 걸렸어요. 막상 다 쓰고 보니 제가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이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물어볼 아버지가 더 이상 안 계시는 것이 참 아쉽기만 합니다. 저는 부모님의 불화로 상처가 많긴 하지만, 저희 아버지는 저에게만큼은 한없이 따뜻했던 아버지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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