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후가 떠나면서 그와 친했던 성과장이 사실상 막내 일을 떠안았다. 그런데 부팀장으로 바뀌면서 이번엔 김 부장이 자기 일을 거의 성과장에게 떠맡긴다. 앞뒤로 일이 중첩된다. 월급이나 대우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성과장은 매일매일 거름을 쌓아두는 기분이었다. 책상 서랍 속 TFT 최종보고서에 있는 자기 이름, 그리고 새로 받은 ‘부팀장’ 명함……든든한 동아줄이 새겨져 있다.
오늘도 김 부장은 성과장과 보고서 하나를 검토하며 새로운 업무지시를 하는 중이다.
“말씀도중 죄송!”
신사업 이카루스팀 최팀장이 보고서 2부를 김 부장의 책상에 던지며 말한다. ‘뭐지’라는 표정으로 둘 사이에서 김 부장이 들고 있는 자료를 살펴보던 최팀장. 그는 뭐라고 할 것 같더니 씩 웃으며 김 부장에게 말한다.
“오늘 2시 이사회 보고 아시죠? 10분 전까지는 들어가야 하니까 한 30분 남았네요. 이건 보고자료 최종본”
속사포처럼 쏘아대던 최상견이 성과장을 보고 말한다.
“관련자들 전부 참석해야 합니다. 사장님 지시사항입니다”
“저도요? 제가 왜?”
“그냥 앉아만 계시면 됩니다. 사외이사님들 전부 오신다니까 의전차원에서 자리 채워 넣는 거죠. 그럼 전 이만!”
최상견이 답변은 필요 없다는 듯 돌아서는데, 김세전이 자료 하나를 들어 성과장의 손에 올려놓는다. 엉겁결에 보고서를 받아 들고 들춰보는 성과장.
“자리 가셔서 일 보세요”
표지가 말끔한 스프링철 자료다. ‘보고자 ㈜마운트업 이카루스, ㈜넥스트 리얼리티’. 성과장은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도 모른 채 자리에 앉았다. 다들 못 들은 채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데 민정희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소리 없는 입술이 ‘왜요?’라고 말하고 있다.
* * *
[이사회 보고자리]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최상견이 첫 번째 슬라이드를 띄웠다. ㈜마운트업 성장현황. 2019년까지는 슬금슬금 우상향이던 그래프가 2020년 1분기부터는 악어가 입을 벌리듯 솟구친다. 다만, 최근에는 각이 한층 꺾였다.
“경쟁업체들 상황은 어떻습니까”
사외이사 한 명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묻는다. 다른 사외이사가 혼잣말하듯 ‘마운트 플랫, 마운트 다운’이라고 읊조린다. 진사장이 미간을 찡그리는데, 최팀장이 웃으며 대답한다.
“전체 시장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는 그중에서도 성장률이 가장 높았었죠. 다만, 경쟁이 너무 치열해지다 보니 다른 시장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진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상견이 잠시 멈췄다가 덧붙인다.
“저희가 준비한 건 이겁니다”
조명이 어두워진다.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가 나타나는 마운트업 유니버스(MU) 프로젝트. 곧이어 3D 이미지들이 보인다. 설산 정상에서 셀카 찍는 아바타, 은하수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모습 등등.
“장비만 파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저희는 이제 ‘경험’을 팔고자 합니다. 세부 영상 보시겠습니다”
2분가량의 재생이 끝나자, 사외이사 한 명이 말한다.
“잘 봤습니다. 화려하네요. 나머지는 저희가 따로 보도록 하고……협력사에 대해 좀 여쭤보고자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조명이 켜진다. 밝아진 회의실에 모두들 눈을 비비는데, 최상견이 마이크를 붙잡고 말한다.
"물론입니다. 다만 협력사와의 계약 적법성 및 실사 관련 사항은 감사실 검토를 거쳐야 합니다. 당시 초기 계약 검토를 담당했던 성인태 과장으로부터 더 정확한 답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지? 실사라고?’ 실수로 이어폰 볼륨을 확 키운 듯 귀가 멍멍하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성인태는 모든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발언을 한 사외이사가 질문한다.
“우리 회사 마운트업 말고, 넥스트 리얼리티 관계자분 계신가요?”
“……”
“바빠서 못 오셨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데, 김세전이 성인태의 팔을 잡아 올린다. 엉겁결에 일어난 성인태.
“아, 성인태 과장님? 지난번에 뵌 적 있죠? 워낙에 꼼꼼하시니까. 넥스트 리얼리티가 이런 플랫폼 개발한 지 얼마나 됐지요? 혹시 정부나 공공기관 사업 참여 경험이 있나요?”
상호와 업종이 스포츠용품 판매나 교육사업과 관련된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할 뿐, 달리 아는 것이 없다. 땀나는 손으로 자료를 넘길 뿐 침묵이 이어진다. 다른 사외이사가 묻는다.
"넥스트 리얼리티 작년 매출이 1억 정도인데 이번에 지급할 용역비가 3억이라고 들었습니다. 연 매출 1억 원의 회사가 3억짜리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나요? 그 판단 근거가 담긴 실사 보고서를 볼 수 있을까요?"
실사보고서라니. 성과장은 넥스트 리얼리티라는 회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최상견을 쳐다봤지만 그는 보고서만 넘겨볼 뿐 아무 말이 없다.
“실사보고서는 없습니다. 신사업 관련자료는 회사방침상 기밀자료라고 애초에 공유가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과장이 어렵게 말을 꺼내는데 김세전이 끼어든다.
“성과장이 긴장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저희 회사 시스템상, 문제가 있을 경우 결재란에 의견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는데 당시 감사팀에서는 아무런 의견 부기가 없었습니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장은 사외이사진 쪽은 외면한 채 최상견과 김세전을 번갈아 쳐다본다. 최상견은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 추가적인 질문이 서너 건 있었고 김세전과 최상견이 간단히 답변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사장이 마른 입술을 다지며 허공을 응시하다가, 성인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린다. 성인태가 손을 들려하는데, 최초에 질문을 시작했던 사외이사가 말한다.
“신사업건은 이 정도로 하시고 다음 건 진행하시죠……”
오늘의 이사회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