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션 너머의 작은 연구자

작은 연구소가 우리 집에 들어온 날

by 아토

우리 집 서재에는 파란 사무실용 파티션이 세워져 있다. 은행 창구에서 흔히 보던, 어른 가슴 높이쯤 오는 바로 그 파티션이다. 방 세 칸짜리 평범한 아파트에서 보기에는 꽤나 이질적인 풍경이다. 그리고 파티션 앞에는 아이가 직접 타이핑해서 출력한 ‘goodtime 연구소’라는 명패도 붙어있다. 최근에는 아이가 'goodtime 설계사무소'로 명패를 다시 바꿔달았지만.


예전 글에서는 아이를 태명인 수리로 불렀지만, 이 연재에서부터는 콩이라고 부르려 한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콩이도 여느 아이들처럼 자기만의 공간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세 식구가 공용으로 쓰는 서재방을 온전히 내어달라고 했다. 아이 아빠도, 엄마도 한밤중에 서재에서 밀린 연구를 해야 할 때가 있어서 안 된다고 했더니, 콩이 역시 자기도 해야 할 연구가 있다면서 ‘나만의 연구 공간’이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도 읽어야 하고 도면도 그려야 한다며 방학 내내 졸랐다. 결국 우리는 이미 수백 권의 책과 어른 책상 두 개로 가득 찬 방 한 구석에 어찌저찌 어린이 책상을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아이가 연구할 때는 집중이 필요하다며, 거실에 깔아 두던 폴더매트를 주섬주섬 끌고 와서 자기만의 파티션을 만들어버렸다.


image.png 연구소 설립 초기, 예산 부족으로 폴더매트로 버틴 시절


폴더매트가 휘어질 때마다 짜증을 내면서, 왜 우리 집에는 사무실에서 보던 그 근사한 파티션이 없냐고 끈질기게 질문했다. 그건 사무실용이고 여기는 가정집이라 부적절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이는 온 가족이 집에서 연구를 하니 연구소라고 봐도 되지 않냐고 되물었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폴더매트가 쓰러지지 않게 엉거주춤 잡고 있던 아이 아빠가 지나가는 말로 “입학 선물로 사무실용 파티션을 사줄까?” 했더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라며 대답한다. 예전에는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던 아이가, 듣고 싶은 말에는 이토록 빠르게 반응한다. 집에 웬 사무용 파티션인가 싶어서 나중에 슬쩍 버리기에도 편해 보이는 종이 파티션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아이의 머릿속에는 사무용 파티션이 자리를 잡아버렸다.


사무용 파티션 가격을 알아보니 15만 원. 캐치티니핑 세트도 10만 원이 넘는다고 하니 신학기 선물로 이 정도면 딱 좋다. 내 머릿속에서 주판알은 이미 튕겨졌고, 결국 사무용 파티션을 주문해 버렸다.


image.png “이제야... 집중이 좀 됩니다.” — goodtime 연구소장




나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이가 다섯 살 즈음 마트에 가서 장난감 대신 배수구망을 사달라고 했을 때도, 포켓몬 카드보다는 배수구망이 가격도 싸고 실용적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 집에 배수구망이 50개 넘게 쌓이게 될 줄은. 심지어 해외에 사는 친구들도 배수구망을 선물로 보내줘서, 우리 집에는 영국제도 있고 스페인제도 있다. 포켓몬 카드게임도 하고 닌텐도도 함께 즐기는 좋은 엄마가 될 준비 중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배수구망 콜렉터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goodtime 연구소’를 설립한 지도 일 년이 지났다. 주말 저녁, 우리 가족은 각자가 원하는 것을 하며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천여 권의 책에 둘러싸인 집에서 나는 노트북으로 에세이를 쓰고, 아이 아빠는 연구 데이터 분석을 위해 코딩을 하고, 아이는 컴퓨터로 설계도를 그린다. 문화인류학자가 우리 집을 본다면 과연 뭐라고 기술할까. 콩 심은 데 콩이 났다고 할까. 어쩌면 우리 집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작은 연구소였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워진 이 일상이, 사실은 굉장히 독특한 우리만의 세계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우리도 처음부터 콩처럼 담백하고 건강한 시간을 보내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소중한 콩이를 팥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던 시간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 내 안에도 아이와 꼭 같은 콩의 모습이 있음을 보았다. 콩은 콩답게 자라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 자식이든, 자기 자신이든,

또 다른 콩을 키우는 어른들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와 응원이 되기를 바라며 연재를 시작한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