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지나가는 길

다이소 배수구망에서 시작된 꿈

by 아토

산 너머 학교로 아이를 등교시키고 돌아오는 길, 숲 속 오솔길을 잠시 걸었다. 어딘지 모르게 따스함이 감도는 봄바람이 양 볼을 스쳤다.


“여기는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에요.”


다섯 살 무렵, 아이가 장난감 블록으로 만든 건물 사이 복도를 가리키며 했던 말이다. 말이 한참 늦었던지라 아이의 모든 말이 신기했던 나는, 그 순간들을 부지런히 동영상으로 찍어 주변에 돌렸다. 나의 대모님이자 콩이의 대조모님이라 할 수 있는 수정화 선생님이 그 영상을 보시고는 말씀하셨다. 공간감각과 상상력이 풍부한 이 아이는 미래에 건축을 할 수도 있겠다고. 장난감 블록 모형 하나 보고 건축가라니, 이 무슨 고슴도치 할멈의 호들갑이란 말인가. 하지만 남다른 통찰력과 애정 어린 시선이야말로 콩알을 싹 틔우는 가장 중요한 자양분이 아닐까 싶다. 콩이도 그렇게 싹을 틔웠다. 다만 그 방향이 조금 독특했을 뿐이다.




아이에게 세상은 늘 무언가가 흘러가는 곳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좋아했다. 드럼 세탁기 앞에 앉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빨랫감을 끝날 때까지 바라보기도 했고, 싱크대 앞에 서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물이 배수구로 빠져나가는 걸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 도가 지나치다 싶어 말리거나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려보려 해도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콩이는 특히 싱크대 배수구망을 좋아했다. 배수구망에 음식물 찌꺼기라도 남아있으면 울고 불고 짜증을 내거나, 왜 치우지 않았냐고 끈질기게 물었다. 어른들은 진땀을 흘리며 청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식약처 위생 점검을 받는 식당 사장님들의 마음이 이러할진저.


이 지독한 배수구 사랑 덕에 민망한 순간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집에 초대받아 갔다가 아이가 싱크대로 돌진해 "이 집은 왜 배수구가 이리 더러워요?" 하고 묻는 날에는, 그냥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도 연락이 왔다. 교실 배수구를 자꾸 손으로 만져서 친구들이 불편해한다는 것이었다. 더럽다고 했더니, 본인은 더럽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친구들이 불편해하니 발로만 만지라고 했더니, 그 이후로는 발로 툭툭 건드릴뿐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동료 교수네 집에 갔다가 콩이가 새로운 모양의 배수구망을 보고 눈을 반짝이자, 그 유쾌한 동료가 배수구망에 날짜와 자기 이름을 적어 선물로 건넸다. 2023.04.16. ㅇㅇㅇ. 작고 둥근 배수구망에 새겨진 그 이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아이를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냥 한 존재로 봐주는 시선 — 그런 어른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핸드백 대신 배수구망을 들고 절을 산책하는 중. 부처님도 이런 신도는 처음이실 것이다.


아이는 유튜브로 싱크대 배수구 청소법을 찾아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전문가들의 배관설비 수리 영상까지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채널을 슬쩍 포켓몬이나 캐치티니핑으로 돌려줘도 아이는 금세 배수구로 되돌아갔다. 관심은 점점 정화조와 상하수도 시스템으로까지 번져갔다. 어느 순간, 세포 냉동법을 밤낮으로 고민하고 있는 나나 하루 종일 배수구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나 무슨 차이가 있나 싶었다.


그즈음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배수구에 대한 사랑을 접게 만들 수 없다면, 물이 흐르는 더 넓은 세계로 데려가 보자고. 문화재단의 어린이 건축학교에도 함께 다녔고, 물을 건축의 언어로 삼았던 안도 타다오와 이타미 준의 건축물도 보여주었다. 건축물 앞에 심드렁하게 서있다가도 "안도 타다오 건물에는 배수구가 몇 개나 있는지 찾아볼까?" 하면 아이의 눈이 번뜩였다. 얼마 전에는 서울하수도과학관에도 다녀왔다. 세상에 하수도를 전시하는 공간도 다 있다니 싶었지만, 아이에게는 완벽한 성지순례였다. 덕분에 나는 빗물도 정화 과정을 거쳐야 재사용할 수 있다는, 살면서 몰라도 될 뻔했던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좌:베란다 물매 잡기를 시도했으나, 큰 공사 규모로 인해 포기한 날의 업무일지. 우: 습도에 따라 작동 방식이 달라지는 싱크대 전용 탈수기 설계안. 일기인지 제안서인지 모를.


아이의 그림일기장을 펼치면 배수구, 배관, 하수도와 같은 단어들이 가득하다. 또래 아이들이 소풍이나 생일을 그릴 때, 콩이는 오늘 산책 중에 발견한 우수관의 구조를 빼곡하게 적곤 했다. 마치 현장을 누비는 노가다 십장의 업무일지 같았다.


그러던 콩이가 어느 날부터 배수구 유튜브를 끊었다. 남들이 하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스스로 스케치북에 배관 시스템과 건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집안 곳곳에 그림이 쌓일 때마다 몰래 버리던 나는, 가족들의 원성에 결국 손을 들었다. 위대한 건축가의 초기작이 될 수도 있는데 홀랑 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컴퓨터로 그리면 외장하드 하나로 되니, 나는 조용히 다른 카드를 꺼냈다. 진짜 건축가들은 컴퓨터로 그린다고 슬쩍 귀띔해 줬을 뿐인데, 아이 아빠가 직접 3D 설계 모델링 프로그램을 깔아주고 가르쳐줬다. 아이는 그날부터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리강박 엄마가 낳고, 이과 아빠가 키운 위대한 건축가의 탄생이었다. 물이 흐르고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SketchUp Pro로 그린 콩이의 배관 시스템




글을 쓰다가 문득 아이에게 묻는다.


“콩이야. 너는 어릴 때 배수구를 왜 그렇게 좋아했어?”

“응, 나는 배관 설비가 잘 갖춰진 건물을 만들고 싶었어.”

“왜 배관 설비가 잘 갖춰져야 해?”

“그러면 환경오염이 덜 되고, 세상이 깨끗해지니까.”


시작은 다이소 배수구망이었다. 언젠가 아이는 세상을 깨끗하게 하고, 그 안에 담긴 마음조차 맑게 만들 건축물을 짓게 될지도 모른다. 콩이가 집 안에 차린 무인카페 메뉴판에 적힌 ‘마음이 맑아지는 차’처럼.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