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요즘 날씨는 아직 쌀쌀하다. 그러나 계절은 이미 봄과 손을 맞잡는 듯, 한 낮이 되면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전해진다. 요즘 여러 매체에서는 서울에서도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은 바로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다. 몇 해를 벼르다 이번에는 나도 그곳으로 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침 봉은사 신자인 분당 사는 이종사촌 언니가 생각나서 연락을 했다. 평일 저녁 시간인데도 언니는 단번에 "좋아" 한다. 분당에서 삼성동까지 대중교통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나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삼성역에 내려 그곳으로 향했다. 오후 5시쯤 언니도 봉은사 입구에 도착했다.
사찰은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도심지 전통사찰로서, 주변에서는 종교적인 공간이면서도 자연스럽게 휴식처가 된 듯한 분위기가 돌았다. 절에 들어서자 매화를 보러 온 듯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봉은사는 오래전 우리 역사와 함께한 사찰로, 신라 원성왕 때 창권 된 절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러 전각을 지나 봄의 주인공인 매화를 찾아 걸음을 옮기던 중 붉게 핀 매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사찰 대웅전 뒤편 영각옆이었다. 이미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은 환한 미소를 띠고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쩌면 그들도 나처럼 매화 피는 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에 꽃을 메단 나무는 제법 오래된 듯해 보였다. 굵은 둥지에 자잘한 나뭇가지가 빈틈없이 빼곡히 어우러져 있었다. 나무 틈새로 주렁주렁 달린 꽃은 온통 통째로 붉은색처럼 느껴졌다. 겨우내 추위를 견디며 메말랐던 가지에 꽃을 피워내는 나무를 보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져, 나는 한참 동안 꽃을 바라보았다.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이규보와 이황의 한시가 퍼뜩 떠 올랐다.
-매화-
"유령에 추위가 닥쳐 언 입술이 터지는데도,/홍분(紅粉)은 천진함을 빼앗기지 않았네."
이규보 시선(이희영 편저)
꽃잎이 마치 추위에 얼어 터진 입술처럼 보이지만, 그 붉은빛은 결코 잃지 않았다는 뜻으로 와닿았다. 아주 오래전 시였지만 나는 여전히 가슴이 울렸다. 추위에도 아량곳 하지 않고 핀 매화꽃 상상만으로도 대단함이 전해졌다. 나는 이 구절을 생각하며 매화를 바라보다 문득 이황의 시 한 구절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어-
"산창에 기대 앉아 밤빛은 차가운데/매화 가지에 달이 올라 밝고도 둥글어라."
퇴계 이황 시선(허경진 옮김)
문득 차가운 밤 둥근달 아래 핀 매화가 가지 위로 둥근달이 얹힌 듯한 풍경이 떠 올랐고, 고요하고도 환상적인 풍경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이규보와 이황이 노래한 한시를 나도 입으로 웅얼거려 보는 그 순간 눈앞의 홍매가 더욱 또렷하게 다가왔다. 매화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끈 이유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시대를 넘나드는 문인들이 남긴 한시를 생각하며, 눈앞에 서 있는 매화의 매력을 찾으려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저 묵묵히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이 매화나무도 그렇게 시간을 견뎌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의 삶도 말없이 지나야 하는 시간들이 있다. 그 시간이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이곳의 나무처럼 언젠가 꽃을 피우는 때가 오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래서인지 우리는 어떤 길 위에 서 있더라도 쉽게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봉은사에 핀 매화는 그렇게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들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곳을 찾는 듯했다. 마침 매화나무 아래 서 있던 이들의 얼굴도 어느새 핑크빛으로 물든 듯 불그스름해 보였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끊임없이 울리는 휴대전화 카메라 소리 속에 매화는 신이 난 듯 더욱 자신을 뽐내며 꽃잎을 틔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마다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봄, 새로울 것도 없는 계절이 될 뻔했는데. 이곳 홍매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홍매를 한 아름 선물 할 테니 올해도 봄처럼 살아 보라고 한다.
한참 생각에 젖어 있던 나는 곁에 있던 언니를 돌아보며 "매화, 어때?" 언니는 환한 표정으로 "너 덕분이다. 이렇게 이쁜 매화를 본 거" 하며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한다. 붉은 매화를 뒤로 하고
우리는 코엑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