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가면 뒤의 고독: 멈출 수 없는 욕망의 비극

by 슈펭 Super Peng


희망이라는 고통의 색 —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녹색'


요즘, 온통 초록색이다. '친환경', '제로 웨이스트'라는 단어들이 우리의 피드를 덮고, 우리는 그 물결에 안도감을 느낀다. 마치 이 초록빛 간판 아래만 있다면, 우리가 짊어진 지구라는 고통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모든 선의의 몸부림이야말로 맹목적이고 쉴 새 없는 '살아남으려는 의지(Wille zum Leben)'가 환경적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가장 세련되고, 동시에 가장 비참한 환영(幻影)일 뿐임을. 인간의 본질이 끝없는 욕망의 결핍과 충족의 반복, 즉 고통의 순환이라면, 소비 욕망은 그 의지의 가장 분명하고 처절한 발현 형태이다. 우리는 초록색 가면을 썼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결핍에 허덕이는 인간의 얼굴이 숨겨져 있다. 이 에세이는 친환경 패러다임이 이 근원적인 '의지'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욕망을 지속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역설을 고찰한다.


업사이클링, 아름다운 재탄생 뒤의 고통스러운 화학적 순환


"버려진 플라스틱이 예술 작품으로, 낡은 가죽이 세련된 가방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문장이 주는 미학적 위안은 얼마나 달콤한가. 우리는 업사이클링이라는 행위에서 느끼는 '좋은 일'을 했다는 일시적인 안도감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회피한다.


이것이야말로 의지의 간계(奸計)가 아닌가. '물건을 소유하고 싶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의지는 죽지 않고 폐기물을 통해 또 다른 형태의 표상(제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쓰레기를 줄이겠다는 맹목적인 의지는 결국 '덜 만든는 것'이라는 고독하고 불편한 진실 대신, '새로운 걸 소유한다'는 일시적인 만족으로 대체된다.


더욱 비관적인 사실은, 이 헛된 재탄생의 과정 자체가 고통의 부하(負荷)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폐기물을 재가공하기 위해 사용되는 화학 접착제, 유기 염료, 에너지 집약적인 고온 처리 등은 환경에 새로운 형태의 손상을 가한다. 이 화학적 고통의 순환 속에서, 쓰레기를 줄이겠다는 의지는 결국 탄소 발자국이라는 새로운 오염을 낳는 끝없는 고통의 순환일 뿐이다. 업사이클링은 소비를 멈출 수 없는 인간 의지의 처절한 몸부림이며, 그 본질적인 고통을 잠시 잊게 만드는 일시적인 환상이다.


종이 빨대 의무화: 환경 규제의 실패와 정치적 책임

해양 플라스틱 오염을 줄이겠다는 취지로 추진된 플라스틱 빨대 금지 및 종이 빨대 의무화 정책은 정책 실패와 정치적 논란이 얽힌 대표적인 사례가 있죠.


환경부와 탄소중립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종이 빨대는 생산 과정에서 플라스틱 빨대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으며 (약 3~4배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2023년, 영국의 BBC Science Focus는 “종이 빨대에서도 PFAS(영구화학물질)가 검출됐다”는 실험 결과를 보도했다.

내구성을 위해 사용되는 코팅재일부 PFAS 등 유해 물질 포함 가능성과 펄프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고, 고온에서 가공하고, 방수 코팅을 입혀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종이 빨대는 음식물과 접촉해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결국 새로운 폐기물이 됩니다. 즉, 환경을 위한 대체재가 실제로는 환경적 부담을 더 가중시킬 수 있다는 역설에 직면했습니다. 또한 경제적행정적 혼란도 야기했습니다. 정책 시행을 믿고 설비 투자에 나섰던 국내 종이 빨대 제조업체들은 정부가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규제를 갑작스럽게 유예 또는 철회하면서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정책 번복은 특정 정치적 목적(총선 등)을 위한 졸속 행정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으며, 환경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크게 떨어트리기도 한다.



이건 ‘플라스틱보다 안전하다’는 믿음을 완전히 흔들었다.

결국 ‘환경을 위해서’ 플라스틱을 금지했지만,
대체품은 더 비싸고, 더 빨리 버려졌고,
결국 더 많은 쓰레기가 생겨났다.
친환경을 향한 한 걸음이,
오히려 새로운 오염의 발자국이 된 셈이다.


업사이클링의 그림자 녹이는 순간, 새로운 오염이 생긴다

병뚜껑을 녹여 팔찌를 만들고,플라스틱 조각을 섞어 인테리어 소품을 만든다.
보기엔 멋지지만, 이 과정에도 탄소 배출과 화학성분 유출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 PET·PP·HDPE 같은 소재를 녹일 때는 휘발성유기화합물(VOCs)이 발생한다.
이는 공기 중으로 퍼져 오존을 생성하거나, 제작자에게 호흡기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환경부가 2022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부 업사이클링 공방은 “소규모 화학처리시설”로 분류되어
일반 폐기물보다 오히려 높은 환경오염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품들이 판매되지 않으면 결국 다시 ‘폐기물’이다.
한 번 더 버려지는, 이중의 낭비가 되는 셈이다.


종이 공예 — 가장 부드러운 재료의 불편한 진실

‘종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착해 보인다. 흙처럼 자연스럽고, 불에 타 사라지니 깨끗할 것 같고,
무언가를 만들 때 플라스틱보다 훨씬 ‘순한’ 재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종이 공예의 현실은 다르다. 종이를 물에 풀어 반죽처럼 만들고,
형태를 잡기 위해 본드나 아교, 수성 바니시, 락카, 코팅제를 섞는다.
질감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폴리비닐계 접착제(PVA)를 쓰는 경우도 많다.
결국 ‘종이’라는 재료는 플라스틱과 화학의 손을 빌려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브제는 한동안 예쁘지만, 습기에 약해 잘 부서지거나 곰팡이가 핀다.
그래서 다시 방수 스프레이나 투명 코팅제를 덧입힌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연 재료’로 시작한 작업이 마지막엔 ‘화학 코팅’으로 끝나는 셈이다.

결국 종이 공예품도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태우면 유해가스가 발생하고,
버리면 코팅된 부분은 분해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제품들을 만들기 위해 ‘원재료를 따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병뚜껑이 모자라면 새로 사고, 플라스틱 가루를 온라인에서 주문한다.
“업사이클링을 하기 위해 새 재료를 산다”는, 참으로 기묘한 아이러니.

결국 우리는 “환경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또 다른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를 살리는 게 아니라, ‘친환경 산업’을 키워내는 중일지도 모른다.


초록색 명패 아래의 영리 가장 저급한 의지의 비참한 표상

가장 냉소적이고 비참한 부분은, 이 숭고해 보이는 초록색 대의가 결국 영리 추구와 결탁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친환경' 사업을 시작하는 기업들의 동기에는 지구를 위한다는 사명감이 아닌, 정부의 지원금과 세제 혜택이라는 차가운 계산이 숨어있다. 환경적 윤리는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윤리가 영리(營利)라는 맹목적인 의지에 복무하는 순간, 모든 고상한 가치는 무너진다. 이는 고통스러운 존재가 잠시의 만족을 위해 더 큰 고통을 감수하는 비이성적 행태와 같다.


기업의 그린워싱(Greenwashing)은 이 비극의 정점이다. 기업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윤리적 기업'이라는 표상을 만들어내고, 소비자는 그 포장된 위선을 구매하며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덧없는 만족을 얻는다. 이 표상의 위선은 우리가 근원적인 소비 욕망을 직시하고 멈추는 것을 방해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하는 의지를 정당화시킨다. 환경을 위한다며 또 다른 시장을 키워내는 이 순환은, 인간의 의지가 이성과 윤리를 짓밟고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비극적 광경이다.


진정한 '친환경'은 고독하고 불편한 '덜 만듦'으로 귀결되지만, 이 '수익 없음'이라는 무가치한 진실은, 가치를 추구하는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처절하게 외면당한다.


고독하고 비관적인 숙제, 의지로부터의 해방


우리는 여전히 이 지구라는 숙제를 풀고 있지만, 이 숙제는 기술적 솔루션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의지에 관한 것이다.


진짜 친환경이란, 덜 만들고 아껴쓰는 것이며 , 이는 곧 '존재하려는 의지(Wille)'를 잠시 중단하는 금욕적 행위를 의미한다. 소비를 멈춘다는 것은, 고통의 원인인 욕망과 의지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맹목적이기에, 이 해방은 너무도 고독하고 어렵다.


정말로 친환경적이고 제대로 된 업사이클링은 대체 무엇일까. 이 의문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근심이 되었다. 우리는 '친환경'이라는 말 앞에서 멈춰 서서 이것이 진정한 초록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고통을 재생산하는 의지의 새로운 표상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남은 숙제는, 이 욕망이라는 맹목적인 사슬을 끊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비관적인 지혜를 바탕으로, 그 의지가 잠시 멈추는 순간의 고독한 평정을 감수하는 일일 것이다. 그 침묵 속에서만, 진정한 초록의 의미를 잠시 엿볼 수 있을지 모른다.


환경을 위한다는 말은 쉽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굴레에 빠진다.
만드는 것도, 소비하는 것도, 심지어 고치는 것도 모두 어떤 형태로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지구의 자원을 빌려 쓰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다.

우린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고, 쓰고, 살아가야 하니까.
결국 답은 ‘무행동’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동’이다.
덜 만들고, 오래 쓰고, 필요 없는 건 욕심내지 않는 것. 친환경이란 완벽함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지속’일지도 모른다.


지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건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걸 ‘환경’으로 포장하는 것도 또 하나의 위선이다.
우린 지금도 답을 찾는 중이다. 그 과정이 바로, 이 시대의 숙제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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