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면 끝날 줄 알았다. 강의실의 그 어색한 공기, 서로 눈치만 보던 침묵, 결국 "제가 할게요"라고 말하고야 마는 그 억울한 패배감까지. 졸업장을 받는 순간, 지긋지긋한 '조별 과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알게 되었다. 학교의 조별 과제는 고작 '순한 맛'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것을.
직장 생활이든, 사회 모임이든, 심지어 가족 관계에서조차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팀을 이뤄야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곳에는 언제나 '그들'이 존재한다. 학교 다닐 때 연락이 두절되던 조원은 회사에서 "중요한 미팅 중이라"는 핑계로 업무를 떠넘기는 김 과장이 되었고, 자료 조사는 대충 하고 이름만 올리던 선배는 교묘하게 성과만 가로채는 상사가 되어 있었다.
장소와 나이만 바뀌었을 뿐, '무임승차'의 메커니즘은 소름 끼치도록 똑같다.
어른의 무임승차는 더 교묘하고 세련됐다. 그들은 대놓고 잠수를 타지 않는다. 대신 "내가 실무를 잘 몰라서", "자네가 감각이 더 좋으니까", "이건 우리 팀을 위한 일이야"라는 그럴듯한 화법으로 포장한다. 학교에서는 기껏해야 학점이 깎이는 게 전부였지만, 이곳에서는 나의 연봉과 평판, 때로는 생존이 걸려 있기에 억울해도 묵묵히 그들의 짐까지 짊어질 때가 많다.
왜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염치'보다 '효율'이 앞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 자본주의 논리로만 따지자면 그들은 가장 똑똑하게 생존하고 있는 셈이다.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사람을 '요령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이 기형적인 구조 속에서, 성실함은 때로 바보스러움과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미련한 성실함'을 믿고 싶다.
무임승차자들은 결과물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그 일을 해내며 쌓인 '내공'은 가져갈 수 없다. 그들이 남의 등에 업혀 편하게 올라가는 동안, 내 다리는 무거운 짐을 지고 버티는 힘을 길렀다. 언젠가 홀로 서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길을 만들 수 있는 건 결국 요령 피우지 않고 바닥부터 굴러본 사람이다.
인생이라는 조별 과제에는 점수를 매겨줄 교수가 없다. 당장 눈앞의 보상은 불공평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긴 시간을 두고 본다면, 삶은 꽤 정직한 정산표를 보여준다. 남에게 업혀 온 사람은 평생 누군가의 등을 찾아 헤매야 하지만, 제 발로 걸어온 사람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러니 오늘도 묵묵히 내 몫을 해내는 당신과 나, 우리는 억울해하지 말기로 하자. 우리는 단순히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지탱할 근육을 만들고 있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