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별에게 묻는가
타로와 사주, 태몽에 관한 불편하고도 아름다운 진실
나는 한때 사주를 보는 사람들을 조용히 무시했다.
“그걸 믿어?” 라는 말을 삼키면서, 속으로는 저 사람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손이 저절로 타로 앱을 켰다.
카드를 뽑았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그 카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무시한 건 미신이 아니었다. 나 자신의 불안이었다.
불확실성이라는 인간의 원죄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자유를 얻은 순간, 동시에 견딜 수 없는 고독과 불안을 얻었다고. 동물은 본능이라는 확실한 지도를 갖고 태어나지만, 인간은 그 지도 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의 존재다. 던져진 존재. 왜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 아무도 미리 알 수 없는 채로 살아간다.
그 근원적인 불안 앞에서 인간이 선택한 것이 종교이고, 철학이고, 과학이고, 그리고 타로와 사주다.
이것들의 본질은 같다.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망.
타로는 점이 아니라 거울이다
심리학적으로 타로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사람은 칼 융(Carl Gustav Jung)이다.
융은 타로의 78장 카드에서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 형상화된 원형(Archetype)을 발견했다. 죽음 카드, 광대 카드, 여황제 카드.
이것들은 특정 문화를 초월하여 인간이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보편적 심리 패턴을 담고 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융이 말한 투사(Projection) 개념이다.
우리는 카드를 볼 때 카드의 객관적 의미를 읽는 게 아니다. 카드에 자신의 내면을 투사한다. 똑같은 “탑” 카드를 보고 누군가는 “붕괴”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해방”을 느낀다. 그 차이는 카드가 만드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원하는지가 만드는 것이다.
즉, 타로는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도구일 뿐이다.
이것은 미신인가? 아니다. 이것은 무의식에 접근하는 하나의 언어다. 정신분석가들이 환자에게 잉크 반점을 보여주는 로르샤흐 검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주: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의 오래된 형식
사주명리학은 단순한 운명론이 아니다.
사주의 핵심 개념인 오행(五行, 목화토금수)은 세계를 다섯 가지 에너지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 동양적 세계관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불·물·흙·공기)과 놀랍도록 유사한 사유 구조를 갖는다.
두 문명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사주에서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당신은 이런 사람이다”가 아니라, “당신 안에는 이런 에너지들이 있고, 그것들이 어떻게 충돌하고 조화하는가”를 본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성격 유형론, 예컨대 MBTI나 애니어그램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우리는 MBTI를 “과학적”이라 신뢰하면서 사주는 “미신”이라 무시한다. 그런데 솔직히 물어보자. MBTI의 타당도 연구들이 사주보다 인간의 삶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가?
둘 다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다만 하나는 서양의 언어를 쓰고, 하나는 동양의 언어를 쓸 뿐이다.
한국인은 왜 특히 더 묻는가
여기서 나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짚고 싶다.
한국인의 불안은 역사적으로 누적된 불안이다. 수백 년간 외세의 침략, 식민 지배, 전쟁과 분단, 그리고 불과 한 세대 만에 이루어진 압축 성장. 이 과정에서 한국인은 개인의 노력보다 운(運)이 인생을 뒤집는 경험을 반복해서 해왔다.
열심히 살아도 역사가 개인의 삶을 삼켜버리는 경험. 그것이 뼛속 깊이 새겨진 민족에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감각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심리학자 호프스테드의 불확실성 회피 지수(Uncertainty Avoidance Index)에서 한국은 상당히 높은 점수를 기록한다. 불확실성을 심리적으로 견디기 힘들수록,
그 불확실성을 해소해줄 무언가를 더 강하게 찾는다.
사주와 타로는 그 심리적 수요에 응답하는 문화적 장치였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사주를 보는 행위는 단순히 미래를 묻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나 요즘 사주 봤는데, 올해가 많이 힘들대. 이 말 속에는 질문이 아니라 위로의 언어가 담겨 있다. 지금 내가 힘든 것이 내 탓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우주적인 면죄부를 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나약하다고 볼 수 있는가. 나는 오히려 그것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태몽: 미신이 사랑이 되는 순간
태몽은 내가 가장 아끼는 한국의 문화적 상상력이다.
신경과학적으로 임신 중 태몽이 선명한 이유는 명확하다. 프로게스테론 수치 상승으로 인한 수면 구조의 변화, 태동으로 인한 수면 중 각성, 그로 인한 REM 수면에서의 각성 증가. 꿈이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생리적 조건이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태몽의 전부인가.
태몽의 진짜 의미는 그 꿈의 내용이 아니라,
그 꿈을 간직하는 행위에 있다. 어머니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이야기. “너는 용이었어. 너는 복숭아였어. 너는 찬란한 빛이었어.” 이것은 예언이 아니다. 존재하기 전부터 시작된 사랑의 서사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을 서사적 존재(narrative being)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존재다.
태몽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이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어머니라는 첫 번째 독자가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의 표지를 설레어하며 만지는 순간.
이것을 미신이라고 부른다면, 그 미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
나는 타로와 사주를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냉소적으로 무시하는 태도 역시 일종의 지적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합리성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인간에게는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그 설명되지 않는 영역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역설적으로 그 사람의 심리적 성숙도를 드러낸다.
타로 카드 한 장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사주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떤 에너지를 갖고 사는가”를 사유하는 것, 태몽 속 상징이 내게 무엇을 말하는지 귀 기울이는 것.
이 모든 것은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붙잡는 사람이라면, 그 질문을 별자리로 묻든 신께 묻든 타로로 묻든, 나는 그 사람을 미신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본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 그것이 인간이 수만 년간 해온 가장 오래된 철학이다.
별에게 묻는다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 질문이 너무 두려워서, 우리는 별을 빌려 묻는 것일 테다.
슈펭